[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방 안의 코끼리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2023. 2. 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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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문제
흰 천으로 가린다고 문제없는 게 아니다

# 오랫만에 한남동 ‘리움’에 갔다. 리움은 우리나라 사설 미술관의 대표 격이다. 물론 한때는 문턱이 너무 높다는 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개막 전시로 문을 연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기획전 ‘WE’는 단지 ‘무료’여서만이 아니라, 고매하고 거창한 미술사적 사전 지식 같은 것이 없이도 누구나 자기 눈높이와 시선으로 작품과 마주해 그것을 해석하며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가히 성공적이다. 1960년 이탈리아 출신으로 요리사, 정원사에서 시체 씻기 알바까지 온갖 일들을 해오며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그라지만, 카텔란의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각자의 처지에서 나름대로 해석될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고 해학적이다. 그런 뜻에서 이번 카텔란의 전시는 작게는 리움의 새로운 변신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고, 크게는 미술이 돈 있는 사람들의 호사가 아니라, 내 시야와 눈길이 닿아 내 나름대로 느끼면서, 나와 한 호흡으로 연결된 세계 속에 펼쳐지는 생활의 일부임을 새삼 발견하게 한다.

/일러스트=박상훈

# 우선 전시장으로 들어서니 탁 트인 공간의 높은 천장 위에 축 늘어지듯 매달린 말의 박제가 눈에 들어왔다. ‘노베첸토(Novecento)’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노베첸토는 900이란 뜻으로 1900년대 곧 20세기를 가리킨다고 한다. 동시에 위대한 이탈리아로의 복귀를 강조했던 노베첸토 운동을 염두에 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위대한 이탈리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죽은 말의 박제는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더는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우리 조국 대한민국도 더 이상은 ‘위대한 조국 대한민국’이 아닌 ‘그저 그렇고 그런 대한민국’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의 거침없는 문화력이 위대한 대한민국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온전한 바탕이 되리라 확신하며 눈앞에 성큼 다가선 거대한 발바닥 벽화로 발걸음과 시선을 옮겼다.

# 거대한 발바닥 사진처럼 보이는 벽화의 제목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가장으로서의 삶의 무게를 지탱하듯 온 몸의 하중을 고스란히 받으며 평생을 버텨냈을 거친 발바닥의 소유자, 바로 그런 이가 ‘아버지’임을 웅변하듯 토해낸 그런 벽화였다. 마치 사진으로 찍은 듯 정교하게 그려진 그 벽화 속 발바닥에는 주름과 굳은살은 물론이고 맨발로 맨땅을 디디고 다녀서 묻은 흙과 모래 알갱이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 벽화의 작가 카텔란의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였다고 하니 맨발로 다닐 일이 별반 없었을 듯싶다. 그럼 이 벽화 속 발바닥은 상상인가? 아니다! 작가 카텔란 자신의 것이었다.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이고, 어머니는 청소부였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온갖 잡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던 그 자신이 자기의 발바닥을 그려 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었던 것이다.

# 남들 보기에 자식을 제아무리 그럴듯하게 키워놨다 해도 부모의 고생을 모르고 자란 자식은 딱 거기까지다. 오늘 자기 자신이 두 발로 세상을 향해 서서 걸어갈 수 있게 되기까지 아버지의 발바닥이 성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자식의 미래는 결코 단단하게 열리지 못할 것이다. 함께 고생해본 자식이라야 아버지의 존재를 아는 법이고, 자신의 미래도 제대로 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한국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재벌 3, 4세들에게 결여된 것이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 2세까지는 그런대로 아버지의 고생을 몸으로 안다. 하지만 3세가 넘어가면 알기가 어렵다. 귀한 도련님으로만 자라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에 아버지의 거친 발바닥과 자신의 보드라운 발바닥이 결코 같은 땅을 딛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재용 회장 같은 경우는 옥살이를 통해서라도 세상 바닥을 자기 발바닥으로 디뎌봤으니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땀이 혈통을 만드는 것이지 돈이 혈통을 만드는 게 아니다. 발바닥이 새로운 시장을 일구지, 사인만 하는 손가락이 미래를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 마지막으로 또 다른 전시 공간으로 들어서니 방 안에 흰 천을 두른 채 눈과 코 그리고 발 부분만 드러내놓은 채 커다란 물체가 서 있었다. 한눈에 코끼리임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지만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리켜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라고 표현한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대통령실과 여당과 심지어 언론마저 딱 그 형국이지 않을까 싶었다. 왜 대통령에게 제대로 말하지 않는가!

# 나라 경제가 참 어렵다. 지난 1월 한 달 무역 적자가 사상 최고, 자그마치 127억원이 아니라 127억 ‘달러’다. 한화로 16조원이다. 게다가 11개월째 적자다. 앞의 정권 탓할 일이 아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윤석열 정부가 헤쳐가야 할 최고의 당면 과제가 다름 아닌 무역 적자 해소다. 그런데 이 와중에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애꿎게 당대표 뽑는 일에 뒤엉켜들고 말았다. 안철수가 끌어들였다고? 안철수만 대통령을 팔았는가? 설사 그렇다 해도 대통령실이 당무에 관여하듯 그렇게 나서야만 했는가? 안철수가 당대표 되면 대통령이 탈당할 것이라는 말 같지 않은 말까지 나와버렸다. 말[言]이 꼬이다 못해 거꾸로 매달린 셈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카텔란이 박제된 말[馬]의 머리는 벽 속에 처박고 몸통을 밖으로 빼낸 것처럼 설치해 놓은 작품 아래서 한참을 서 있었다. 작금의 우리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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