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 ‘강한 국가’의 환상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2023. 2. 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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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강한 국가’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방비 폭탄이 투하되면, 국가는 난방비를 지원하여 국민이 느끼는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에너지 가격이 오르고, 강력한 한파로 사용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그 원인이 지정학적 질서의 변화이든 아니면 기후변화이든, 국가는 우연적 위기도 해결해야 한다. 설령 운전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사고가 났더라도 도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국가는 일정 부분 보상을 해야 한다.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이나 기후 재앙을 극복하고 국민에게 안전한 삶을 보장하려면 강한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상 강한 국가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는 처벌과 제재의 부정적 권력을 생각하지만, 이제 우리는 군대와 경찰보다는 병원과 어린이집을 생각한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우리는 국가가 어떻게 오늘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 역사성을 거의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미래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대안이 상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문제에 대한 논의와 대화가 정확하지 않아 핵심 문제는 건드리지 못하는 유령 토론이 된다. 사람들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국가’를 소환하고 또 국가는 이에 부응하듯 상투적으로 ‘국민’을 말하지만, 어떤 국민이고 누구의 국가인지 그 실체는 모호하다.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이 뒤죽박죽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화물연대 집단 운송 거부 사태에서 보듯이 불법 시위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한 국가’를 요구한다. 거짓, 선동, 폭력 세력과는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되며 이를 “바로잡지 못하면 국가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강한 국가’를 대변한다. 반면 난방비 지원을 중산층과 서민까지 확대하라는 그의 단호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종종 ‘약한 국가’의 모습을 보인다. 평상시에 에너지 수급 체계 상황, 소아과 의사 부족 사태, 보육시설의 미비에서 보듯 기반시설을 제대로 구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곤경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이런 곤경이 아예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조치를 취하는 국가는 ‘강한 국가’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이 국가는 제재하기보다는 예방하고, 범죄화하기보다는 보호한다는 점에서 강하다.

어느 정권에서도 국민은 없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강한 국가’의 두 가지 버전을 각각 정치적 스펙트럼의 좌우에 배치하여 이해했다. 우파의 보수정권은 전통적으로 시정하고 처벌하고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제시하는 강한 국가를 요구해왔다. 반면, 좌파의 진보정권은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촉진하고 강화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강한 국가를 추구해왔다. 제재보다는 통합, 불신보다는 신뢰, 경찰보다는 학교, 재정의 긴축보다는 확대라는 정치적 수사학은 겉보기와는 달리 훨씬 더 크고 강한 정부를 요구한다.

두 정치 세력이 국가에 대한 이해에서만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평가하는 데서도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그들은 모두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민주주의 교과서를 읊어대지만, 그들이 국민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다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말하는 ‘일반 의지’, 즉 국민의 단일한 공적 의지는 단지 추상과 상상으로만 가능하다. 국가와 국민은 오직 선거일에만 연결될 뿐, 국가는 대체로 국민과 분리되어 관료제를 통해 전문적으로 운영되고 국민을 통치할 뿐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강한 국가’가 실제로는 ‘국민과 분리된 국가’라는 의심이 여기서 싹튼다. 보수적 의미에서 국민을 제재하는 강한 국가만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적 의미에서 국민의 이익을 선제적으로 보호하는 국가도 포퓰리즘으로 우리의 삶의 토대를 파괴한다. ‘누가 난방비 폭탄의 주범인가?’라는 소모적 말싸움은 실체가 없는 허깨비 논쟁인 이유이다.

어느 정권에서도 국민은 없었다. 국민과 분리된 국가에서 진정으로 국민이 참여하는 국가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이해를 바꿔야 한다. 한때 기반시설을 건설하고 건설 경기를 부양함으로써 경제를 활성화하는 국가가 강한 국가로 여겨졌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이 대표적이다. 좌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기조는 바뀌고, 국가는 복지에서 강한 정부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경제성장 둔화와 물가 상승의 조합, 오래 지속되는 노동 분쟁 및 파업의 물결과 결합하여 국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우파는 이를 ‘예방 국가’를 불신하고 ‘행정 국가’를 장려하는 데 이용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강한 국가의 전환으로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사람들은 더욱더 ‘행정 국가’의 직접적인 효과를 기대한다. 국민은 소위 일하는 정부가 우리에게 가져다줄 이익이 무엇인지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난방비 지원은 어느 정도인지, 서민뿐만 아니라 중산층에도 지급되는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우리 지역에 어떤 시설이 들어서는지, 그것이 혐오시설인지 아니면 자산 가치를 높여줄 유익한 시설인지만 논란이 된다. 국가가 모든 것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 할수록, 국민은 자신의 삶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국가만 쳐다본다.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일종의 ‘보험회사’가 된다. 국가가 우리의 삶에 간섭할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면, 그 결과는 역설적으로 ‘권위주의적 자유주의’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살기 위하여 강한 국가의 통제와 제재를 자발적으로 원하기 때문이다. 자기 이익의 확대에만 관심 있는 신자유주의가 거꾸로 강력한 국가의 통제를 원한다는 것은 실로 역설이다.

정치 참여해야 비로소 국민이 된다

강한 국가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실현하는 ‘국민’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공적인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지만 함께 해결하려 할 때만 정치적 공간이 생기며, 그곳에 비로소 국민이 존재한다. 모든 문제를 관료적으로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강한 국가를 원한다면, 국가는 단순한 행정기구로 전락하고 우리 사회는 그렇게 탈정치화된다. 정치 공간에서 국민은 사라지고, 국민이 없는 관료적 지배는 독재가 된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관료에 의한 익명의 지배는 “아무도(nobody) 지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독재적”이다. 우리는 정작 재난 사태와 위기 상황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국가를 비난하지 않는가?

국가로부터 분리된 ‘국민’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되살려야 한다. 우리 국민이 우파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통제의 대상이 되든가 혹은 좌파적인 관점에서 단순히 보호의 대상으로 전락하면, 우리 역시 ‘아무도 아닌 사람’(nobody)이 된다. 정치적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국민이 된다. 그런데 최근의 두 사건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사회는 심각하게 탈정치화되고 있다. 우리처럼 정치에 관심이 많은 나라도 없다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정치를 소비하는 것일 뿐 실제로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는 난방비 폭탄과 관련한 논의에서 드러나듯 모든 책임을 국가에 전가하는 현상이다. 한겨울에도 방 안에서 반팔 차림으로 지내는 데 익숙한 것은 아닌지, 기후변화 때문에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는 노력은 하였는지, 기후변화의 피해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가혹한 것은 아닌지에 관한 성찰적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이 전 정부 탓이든 아니면 제때에 대처하지 못한 현 정부 탓이든, 모든 게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공적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없다면, 정치도 없고 국민도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당의 민주화가 위태롭다는 사실이다. 한쪽에서는 강한 정부를 위해 대통령과 함께할 수 있는 당대표가 선출되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특정 정치인을 배제하는 비민주적 행태가 자행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위기에 처해 있는 당대표를 구하기 위해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부정적 팬덤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모두 강한 국가를 위해 강한 정당을, 그리고 강한 정당을 위해 강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시민과 당원을 단순히 수단으로만 보는 것이다. 정당이 다양성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적이지 않다면, 허울만 민주적일 뿐인 우리 사회의 어느 곳에도 국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한 국가의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고 직접 참여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국민이 된다. 우리가 바로 국가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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