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00] 소설은 거짓이 아니다

김규나 소설가 2023. 2. 8.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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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책은 모두 다르지만 형편없는 책은 완전히 똑같다. 이런 일을 하면서 나쁜 책을 수도 없이 읽은 후에 내린 결론이다. 너무나 형편없어서 출간될 수도 없는 책들. 소설이든 회고록이든, 나쁜 책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거다.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좋은 책이 반드시 진실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읽는 동안만큼은 사실처럼 느껴져야 한다. - 로버트 해리스 ‘유령 작가’ 중에서

해외 도피 중 검거된 전 쌍방울 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현 민주당 대표가 경기도지사였던 시절, 전 회장은 그를 위해 남북 교류 행사비, 북한 사업 조성비, 방북 추진비 등, 총 800만달러 이상을 지원했다고 진술,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던 주장을 번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고, 전화 통화한 기억도 없으며, 쌍방울과의 인연이라면 내의 한 벌 사 입은 것뿐”이라고 말해온 민주당 대표는 점점 불어나고 있는 의혹에 대해 “검찰의 신작 소설이 나온 것 같다. 창작 실력으로 봐선 안 팔릴 거다”라고 말했다. 기자들의 계속되는 질문에도 “소설 가지고 그러는 것 같다. 소설 가지고 자꾸 그러지 마시라”고 답했다.

엄청난 대가를 받고 유명 정치인의 자서전을 쓰게 된 소설 속 대필 작가는 죽은 선임자의 초안 원고가 형편없다고 생각한다. 잘해보려는 의욕을 갖고 작업하던 그는 절대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찾아낸다. 왜 ‘책 전체가 거짓처럼’ 느껴졌는지, 왜 작가가 자살 같은 죽음을 당했는지도 알게 된다. 정치가 얼마나 무서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 그의 목숨도 위태로워진다.

좋은 소설은 진실을 위해 허구를 차용할 뿐, 사실을 감추려고 거짓을 꾸미지 않는다. 누구나 소설이 허구라는 걸 알지만 좋은 소설에는 감동이 있다. 소설을 읽고 진실에 눈떠본 사람은 ‘소설 쓰고 있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쁜 소설만 접해본 듯, 궁지에 몰린 정치인들이 결백을 주장하며 소설 운운한다. 당대표의 혐의가 사실로 드러난다면 앞으로는 거짓말하는 사람에게 ‘정치하고 있네, 정치하지 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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