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를 듣는 느른한 오후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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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스푼의 위로가 필요하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느른한 오후다. 이 노래는 후추 넣은 음식처럼 매콤하다. ‘낭만에 대하여’(최백호, 1994)란 유행가는 추억에서 위로를 구하는 낭만 과잉의 시요, 퇴락의 그림자 짙은 세월의 덧없음에 바친 헌사다.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뻐근해지다가 한쪽이 조용히 허물어진다.
청각을 두드리는 탁성은 거칠다. 그 가사가 전하는 외로움은 감미롭다. 농담과 담배연기 너머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떠오른다. 뻗친 머리카락, 이마와 눈가의 파인 주름들, 턱수염으로 추레한 얼굴은 막장 현실에 지친 자의 고단함과 상처들이 나무 옹이처럼 굳어진 채다.
낭만과 현실 사이 '느림의 미학'
가수 최백호 특유의 탁성과 선율, 청승맞은 가사는 잘 어우러진다. 낭만을 열쇳말로 삼은 노래는 청승맞다. 하지만 그것은 늙고 지친 자의 안식을 감싸는 낭만에서 나오는 광휘로 빛난다. 그 내용물은 현실적 실효를 잃은 지 오래다. 궂은날 옛 정취가 남은 다방에 앉아 실연의 달콤함을 곱씹으며 값싼 위스키나 홀짝이는 낭만이란 신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노래가 호명한 추억의 세목은 도라지 위스키, 색소폰 소리, 변두리 다방의 마담, 선창가에서 듣는 쓸쓸한 뱃고동 소리,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첫사랑 소녀 따위다.
노래의 주인공은 존재의 가난으로 외로운 상태다. 더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자에게 현실의 곤핍은 쓰라리다. 망각의 세월 저 너머에서 늙어갈 첫사랑 소녀가 내미는 손길은 가망 없는 가느다란 기대요, 헛된 환상이다. 스쳐 지나가는 환상에서 깨면 세월의 덧없음과 파편으로 나뒹구는 청춘의 미련 따위와 마주할 테다. 세월이 데려간 것들로 생겨난 상실감이 찌르는 빈 가슴에서 외로움은 세균처럼 번성한다. 아, 존재의 가난 속에서 부르는 낭만 노래라니!
‘낭만적’이란 말은 영어 ‘로맨틱(romantic)’의 소릿값을 빌린 일본식 조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낭만은 진정성이란 함량이 헐거운 죽은 단어다. 이것이 지시하는 기의(記意)는 하찮음이고 껍데기며 진정성의 시늉뿐이다. 사는 동안 낭만 운운하는 사람치고 반듯하게 제 삶을 꾸린 이를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이성보다 영혼의 감성 능력을 앞세우는 지복의 누림이고 즐거움의 향유일 텐데, 타인의 수고와 고통을 배제한 개인의 낭만이란 거짓 즐거움, 윤리의 퇴락, 비루한 일탈이다.
그 바탕은 시난고난하며 먼 길을 돌아온 탕자의 퇴행하는 감정이다. 노동자가 제철소 용광로에 빠져 그 존재가 흔적 없이 녹아 사라지고, 생존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어미가 제 새끼를 굶겨 죽이는 현실의 엄혹함 속에서 낭만 예찬이라니! 이 낭만이 무른 정신과 과도한 센티멘털의 산물이라면 이것은 너무 한가롭지 않은가?
하지만 사라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분비하는 멜랑콜리는 언제나 한도를 초과한다. 이 멜랑콜리가 우리 안의 슬픔, 회한, 애달픔, 갈망을 두드려 깨운다는 것조차 모른 척 외면할 수는 없다. 싸구려 위스키 한 잔에 속이 뜨뜻해지면, 불운한 인생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한 남자의 탄식은 잦아들고 돌연한 슬픔이 고개를 든다.
밤늦은 항구에 돌아올 사람은 없다. 첫사랑 소녀는 어디선가 늙어가겠지. 빈 가슴엔 세월의 서글픔과 다시 못 올 것들이 만드는 그리움이 차곡차곡 쌓인다. 삶에 지친 채 시드는 한 남자의 기억 속 첫사랑 소녀는 실재가 아니라 환(幻)이거나 망상에 더 가깝다. 가슴에 환 한 조각조차 품을 수 없는 사람에게 삶은 얼마나 더 팍팍할 것인가! 왠지 가슴 한 곳이 비어 있고,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진다고 하지 않는가!
이 노래가 데려가는 장소는 옛날식 다방이고, 밤늦은 항구의 선창가 술집이다. 이런 장소는 세월의 흐름이 느려진 퇴락한 곳,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을 거덜 내고 돌아온 탕자의 자리, 뒤처지고 내쳐진 자, 즉 사회 부적응자의 고독이 오롯한 지대다. 노래가 애틋한 것은 사라진 것,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일으킨 서러움과 멜랑콜리 탓이다.
노래의 맥락 속에서 ‘이제’라는 부사는 꽤 큰 소임을 수행한다. 이것은 카오스를 뚫고 솟는 리얼 타임이고, 지속하는 시간을 가르는 한 기준점이다. 이제라는 시공엔 과거가 돼버린 이전과 견줘 속도의 지체가 돌올하게 드러난다. 떠나고 남은 것들 사이엔 느린 시간만이 흐른다. 나이 듦이란 곧 느린 시간을 향유하는 일이 아닐까.
시련과 권태를 이기게 하는 힘
이 부사는 둥근 수박을 쩍 하고 가르듯이 찬란한 과거와 퇴락한 현재, 즉 환상과 현실에 간극을 만들며 두 쪽으로 나눈다. 첫사랑 소녀, 삶을 향한 갈망과 기대 따위가 이제 저쪽에 있다면, 지금 여기엔 실연의 달콤함과 청춘의 미련들, 덧없음, 멜랑콜리가 바글거린다.
첫사랑 소녀의 미소가 싱그러운 날들은 저 멀리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의미의 맥락 안에서 ‘이제’란 부사는 첫사랑과 늙음 사이에 놓인 휴지부다. 설렘과 기쁨으로 약동하는 첫사랑의 시간과 시들고 유동이 잦아드는 늙음의 시간은 ‘이제’를 경계로 둘로 나뉜다. 첫사랑을 잃은 자는 빨리 늙고, 더는 새로운 무언가를 도모하려 하지 않는다. 오, 늙음은 서럽고 아득해라! 순정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늙어가는 자의 탄식과 비애, 돌이킬 수 없는 회한과 미련이 가슴 깊은 데를 두드린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나는 이 노래가 전면에 내세운 낭만을 삼류 감성팔이의 한 품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용량을 초과하는 낭만을 고갱이 삼은 이 노랫말을 최고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유행가에 담은 한 줌의 추억과 얼마간의 멜랑콜리도 필요한 법이다.
유행가가 우리에게 주는 한 스푼의 멜랑콜리와 두 스푼의 위로는 돌연 삶의 시련과 권태 따위를 능히 견디고 이겨낼 힘으로 전환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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