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칼럼] 일본은 간판 기업 도쿄일렉트론을 왜 위기로 몰아넣나
극적으로 변했다
전후 장벽을 부수고
군사·기술의 완전체로
미일 동맹을 만들었다
오늘의 일본은
어제의 일본이 아니다
도쿄일렉트론은 일본이 자랑하는 첨단 반도체 제조 장치 기업이다. 이 회사 몇몇 제품이 없으면 세계 반도체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다. 1월 말 일본 정부가 자해에 가까운 방침을 세웠다. 미국의 대(對)중국 전선(戰線)에 동참해 일본 반도체 제조 장치의 중국 수출을 사실상 금지한다는 것이다. 일본 반도체 장치의 연간 중국 수출액은 전체 수출액의 33%인 10조원 수준이다. 이 중 5조원어치가 도쿄일렉트론 제품이다. 죽으라는 소리로 들린다.
그런데 시간을 돌리면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작년 12월 미국 IBM이 차세대 2나노 반도체 기술을 일본에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기술을 제공받는 라피다스는 생소한 신생 기업이지만 출자자는 익숙하다. 도요타, 덴소, 소니, NEC, NTT, 소프트뱅크, 키옥시아(옛 도시바) 등이다. 일본의 반도체 기술은 20년 뒤진 상태라고 한다. 이 격차를 미국이 줄여 주겠다는 것이다. 라피다스 회장을 도쿄일렉트론의 직전 사장이 맡았다는 사실도 각기 다른 뉴스를 한 의미로 연결해 준다. 실은 주고받은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작년 7월 이른바 ‘경제판 2+2′ 회의를 열었다. 양국 외교·경제 장관 회의다. 반도체 등 첨단 기술 보호와 생산 능력 강화, 연구 개발 협력을 약속했다. 1월 미일 정상회담에선 협력 범위를 우주·AI·양자·바이오 분야로 확대했다. 한미도 비슷한 약속을 한다. 하지만 미일은 말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구체적인 결과를 내고 있다. 축적된 성과도 많다. 도쿄일렉트론과 라피다스 뉴스를 분리하면 미국의 경제 패권주의와 일본 반도체 산업의 안간힘으로 각각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나로 연결해야 ‘미일 기술 동맹’이라는 본질이 보인다. 첨단 안보 분야에서 두 나라는 한 몸이 되고 있다.
1월 말 미국이 중거리 미사일 일본 배치를 잠정 유보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동맹 강화와 반대로 가는 내용인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일본 스스로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덜어준 비용을 미국은 다른 전선에 투입할 수 있다. 일본은 작년 12월 국가 안보 전략을 바꿨다. 그동안 일본은 평화 헌법에 따라 무기와 국방 예산을 제한했다. 이 벽을 허문 역사적 사건이다. 일본은 5년 동안 430조원을 군사에 쏟아붓는다. 사정거리 1250㎞ 이상의 토마호크 500기와 1000㎞ 이상의 개량 유도탄 1000기 등 공격 무기를 배치한다. 요격 불가능한 사정거리 3000㎞ 이상의 극초음속 미사일도 개발한다. 미국 정부는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했다.
증세 예고도 파격적이다. 법인세, 담뱃세 등을 올려 국방비에 쓰겠다고 한다. 무력을 위한 증세는 일본에서 금기였다. 금기를 깼다.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70%가 증세에 반대한다. 그런데 군사력 강화에는 60%가 찬성한다. 증세 반대가 아니라 군비 찬성 여론에서 일본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강한 일본’은 일본 우익의 소망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일본은 그동안 한국이 알던 일본이 아니다.
많은 한국 언론은 일본의 팽창적 변화가 한반도와 동북아 안정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야당은 “굴종 외교가 안보 위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중국·북한을 빼면 세상을 이렇게 읽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한국은 북중의 위협을 일본보다 더 받는다. 그런데 이들은 놔두고 78년 전 미국이 무너뜨린 일본 제국주의 유령과 지금도 전쟁 중이다. 일본의 변화가 한국에 주는 신호는 분명하다. 미일 동맹이 군사·경제를 포괄하는 완전체로 성장했고, 반도체처럼 한국의 미래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두 달 동안 벌어진 일은 한국이 미국·일본과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군사 안보만이 아니다. 정부가 사활을 걸고 육성하는 첨단 산업의 거의 모든 분야가 미일 기술 동맹의 내용과 겹쳐 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편협한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언젠가 한국은 여러 분야에서 미일 연합군을 맞아야 하는 외로운 처지에 몰릴 수 있다. 일본의 공격 무기 배치는 2027년 완료된다. 무리인 듯하지만 일본의 차세대 반도체 양산 시점도 2027년으로 잡혀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 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는 시점도 중국 인민해방군 100주년을 맞는 2027년이라고 한다. 그때까지 한국은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
일본을 따라 할 이유는 없다. 처지도, 이익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현대사의 변곡점에서 일본의 변화가 예외 없이 한국의 변화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1902년 영일 동맹은 한국의 망국, 1940년 일본과 독일의 동맹은 한국의 해방으로 이어졌다. 1952년 미일 동맹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탄생한 한미 동맹은 한국을 번영시켰다. 분명한 것은 일본이 다시 변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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