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109] 어떤 극일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밝힌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1년 뒤인 1919년 2월 1일 중국 지린성에서 39인의 지식인들이,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11인의 유학생들이, 그리고 3월 1일에는 서울에서 33인의 사회 지도자들이 연쇄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당시 도쿄에는 조선 유학생들이 1000명이 넘었다. 그들의 유학 목적은 조선의 권익 신장에 있었으므로 일본 교육을 받으면서도 반일 감정이 컸다. 게이오대학 이재학과(경제학과) 3학년생 김도연이 그중 하나였다. 그는 2·8 독립선언을 주동한 죄로 9개월의 금고형을 받는 바람에 졸업 자격을 잃었다. 그러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천신만고 끝에 미국 경제학 박사가 된 김도연은 1932년 귀국한 뒤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총독부가 식민 교육을 강요하는 데 염증을 느끼고 곧 교단을 떠났다. 그리고 사업가가 되어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요주의 인물로 찍히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또 한 번 형무소로 끌려갔다. 해방이 되자 정치에 투신하여 초대 재무장관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일본처럼 산업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미국이 동의하지 않았다. 농업국가인 한국은 공업국가인 일본에 식량과 지하자원을 공급하는 것이 순리라면서 ‘경제 안정 15원칙’을 요구했다. 성장보다 인플레와 무역 적자가 더 급하다는 뜻이었다.
김도연이 묘안을 짰다. 한국이 산업국가를 지향하더라도 물가 안정을 포함한 ‘경제 안정 15원칙’은 미 연준처럼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통해 지키겠다고 미국을 설득했다. 한국은행 설립안이었다. 정부에서 독립된 중앙은행은 일본도 감히 꿈꾸지 못한 파격적 금융 선진화였다. 김도연에게는 그런 것이 바로 극일이었다. 평생 항일과 극일에 힘썼던 김도연이 1919년 오늘 도쿄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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