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그것은 부당했고, 난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초기작·미발표작 10편 묶은 환상문학
‘완전한 행복’ 러 참칭자 사건이 모티브
용서와 복수, 가혹한 선택의 문제 조명
‘저주토끼’로 부커상 후보 올라 유명세
부조리한 세계에 맞선 사람들 이야기
“만약 재미없으면 안 읽으셔도 됩니다”
무척 재미있군. 슬라브 문학 전공자로서 러시아 문화와 역사를 강의하기 위해서 자료를 준비하던 그는, 16∼17세기 러시아 동란 시대의 ‘참칭자 드미트리’ 사건을 접하게 됐다. 처음에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1598년 표도르 1세가 후사를 남기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긴 뒤부터 새롭게 로마노프 왕조가 성립되는 1613년까지, 러시아는 큰 혼란에 휩싸였다.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대기근이 발생해 많은 농민이 유랑했으며, 사이비 이단 종교가 속출해 종말이 온다는 이야기가 끝없이 퍼져 나갔다. 이때 ‘드미트리 1세’ 등 왕을 참칭하는 자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은 모스크바에서 셀프 대관식을 가졌다가 10개월 만에 피살되기도 했다.
작가 정보라는 ‘참칭자 드미트리’ 사건을 모티브로 냉혹한 세계에 비정하게 맞서는 주인공을 그린 작품을 쓴 뒤 2010년 웹진 ‘거울’에 발표했다. 단편 ‘완전한 행복’이었다. 왕을 참칭하는 자와 진압군에 의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소년은, 누이와 함께 유형지에 끌려간다. 유형지에서 누이마저 잃은 소년은 어느새 청년이 됐는데, 자신이 사는 곳에 늙고 초라해진 참칭자가 찾아온다. 누이의 말을 떠올리며 용서를 고민하지만, 한 점 후회도 없다는 참칭자의 반성 없음에 복수의 도끼를 비정하게 치켜든다.
“잘못이 있음에도 자각하지 못하여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용서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선이나 자비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의였다. 눈에는 눈, 피에는 피. 그는 일어서서 도끼를 집어 들고 오두막을 나왔다.”(416쪽)
이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가 된 정보라는 10여년 전 ‘정도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초기 우리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정 작가를 지난달 19일 전화로 만났다.
―‘완전한 행복’에서 복수를 실현한 주인공이 행복감을 느꼈다고 하는 대목은, 조금 서늘하더라. 감각이 너덜너덜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과연 복수를 실행한 그의 행복이 정말 행복일까. 반어적인 의미다. 사람을 죽이고서 행복해질 리가 없다. 반대로 참칭자를 죽이지 않고 억지로 용서하는 것 또한 평생 괴롭지 않을까. 용서와 복수, 양자택일 어느 쪽으로도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상에는 이처럼 가혹한 선택 앞에 처한 사람들이 많다.”
소설집의 첫 작품 ‘나무’는 나귀를 타고 가는 여행객에게 장난으로 개암을 던졌다고 땅에 파묻힌 뒤, ‘검은 나무’가 돼버린 장애인 친구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남자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은 사건에서 시작했다가 결국 죽음으로 치닫는 인과의 연쇄가 서늘하다 못해 공포스럽다.
―‘나무’는 어떻게 나왔는지.
“1990년대 출간된 ‘세계 호러SF 단편선’에 디스토피아 미래를 배경으로 억압적인 정부가 사람들을 길에다가 움직이지 못하게 세워놓고 천천히 나무로 변화시키는 형벌을 주는 내용을 담은 일본 SF 작품이 있었다. 남성 주인공이 체념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나, 여성 주인공이 성범죄의 표적이 되는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전개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Nessun sapra(네순 사프라)’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숙청당해 정신병원에서 죽어간 소설가 이바쵸프와, 그의 시체를 잘라 먹으며 기괴한 사랑을 지켰다는 간호사 류보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소설은 러시아 작가 다닐 유바쵸프와 브루노 야셴스키의 삶을 조합해 만들었다고 했는데.
“2009년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러시아 작가와 폴란드 작가의 작품을 비교했다. 그런데 그 폴란드 작가 브루노 야셴스키의 삶이 정말 드라마틱했다. 소련으로 귀화해 인기 작가가 됐지만, 스탈린 숙청기에 체포돼 감옥에서 사망했다. 두 러시아 작가의 삶을 섞어 소설을 썼다.”
소설집에는 이 밖에도 환영이 주는 쾌락에 중독돼 몰락해 가는 택시기사를 괴기스럽게 그린 ‘가면’, 갑자기 하늘에서 내린 씨앗 비가 틔운 머리카락 때문에 방안에 갇힌 채 생활하는 사람을 그린 ‘머리카락’, ‘전설의 고향’의 유명한 대사 ‘내 다리 내놔’를 떠올리게 하는 귀신 이야기 ‘비 오는 날’ 등도 담겨 있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보라는 2008년 웹진 ‘거울’에 독자투고 형식으로 단편소설 ‘죽은 팔’을 발표했다. ‘죽은 팔’은 잡지 ‘판타스틱’에도 실렸다. 이어서 ‘거울’ 필진이 된 데다가, 마침 그해 구미호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 ‘호’가 디지털문학상 우수상으로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화했다.
―작가로서의 포부나 꿈, 지향을 알려 달라.
“호러이고 장르 문학이니 일단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가벼운 재미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에 어떤 식으로든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것은 부당했고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서 거기에 저항했다, 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쓰게 되는 것 같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난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뒤 바뀐 게 있느냐는 물음에, “해외의 초대가 아주 많이 늘었다”며 정보라가 덧붙인 대답을. 비행기를 타기 너무 싫어요, 라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올해 ‘밀리의서재’에 장편 SF ‘고통에 관하여’를 공개하기로 했고, 장편소설 ‘호’ 등을 펴낼 예정인 그의 작가적 걱정을. 지금 너무 많은 계약을 오케이 해버려서 굉장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정말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인터뷰 끝자락에 그가 했던 겸양의 부탁을. 재미없으면 안 읽으셔도 된다는 얘기 꼭 써달라는. 의무감을 가지고 읽으시는 분들이 되게 많은 것 같은데, 그럴 필요 절대 없다는 말을 써달라는.
그럼에도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일단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오기만 한다면, 곧 스스로 피부를 뚫고 파고드는 공포와 괴기와 환상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그로테스크하고 부조리한 세계와, 이 세계에 맞서 복수의 반격을 시도하는 사람들과, 그 복수 뒤에 오는 서글픈 비의를. 그리하여 기이하고 불온한 환상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에 가차 없는 반격을 가하고 있는 정보라를.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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