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위기는 대전환의 기회…공공정책이 혁신 뒷받침해야”[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서의동 기자 2023. 2. 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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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장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장이 지난달 26일 세종시의 대학원장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유 원장은 “한국 경제가 지식·데이터 기반 경제로 본격 전환해야 할 시기”라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공공정책도 과학적 분석과 평가에 기반해 창의적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했다. 서성일 선임기자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노트르담대, 영국 케임브리지대, 일본 리쓰메이칸대를 거쳐 1998년부터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개혁적 시각에서 한국 경제의 발전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으며 경제 성장, 소득 분배, 경제 민주화 등 분야에서 정책 대안을 제시해 왔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금융행정혁신위원회, 생활방역위원회 등에서 정책 자문을 했다. 2019년 발표한 ‘전환적 뉴딜’ 보고서가 ‘한국판 뉴딜’ 정책의 밑거름으로 평가받아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유종일의 진보 경제학> <경제119> <위기의 경제> <경제 민주화가 희망이다> 등이 있다.
제조업 일변도서 벗어나 지식·데이터 경제로 전환 부가가치 높여야
지금은 탈세계화가 아닌 재세계화…‘중국 끝났으니 탈출’은 당치않아

‘퍼펙트 스톰’과 ‘회색 코뿔소떼’가 몰려온다. 어느 전문가가 진단한 올해 국내외 경제 상황이다. 이미 예고된 경제충격이 동시다발적으로 닥쳐오지만 사실상 속수무책이란 뜻이다. 역대급 물가 상승, 대규모 무역적자, 소비 침체, 난방비 폭등….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뉴스들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충격이 여전한 가운데 미국이 보호무역 기조를 본격화하고 유럽연합(EU)도 뒤질세라 장벽을 세우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제품의 공급망 분리가 본격화하면서 중국 비중이 큰 한국의 선택을 어렵게 한다. 지난 30여년간 세계화의 최대 수혜국이던 개방형 통상국가 한국이 중대 기로에 놓여 있다.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장은 “지금 위기를 한국이 제조업 일변도에서 벗어나는 대전환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매뉴팩처링 의존 경제에서 지식·데이터 기반 경제로 전환해야 하며, 공공정책도 데이터와 증거에 기반해 추진돼야 한국이 직면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유종일 원장은 “첨단산업과 과학기술 못지않게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혁신하는 것도 중요한데 이는 공공정책이 해야 할 몫”이라며 이런 이유 때문에 공공정책 혁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세종시에 있는 KDI 국제정책대학원 원장실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 올해 한국 경제는 어렵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총체적 난국입니다.

“지난해에는 시장 예상보다 조금 더 어려워질 것 같다고 봤는데, 그래도 최악은 피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깁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잡히는 기미가 보이고, 중국이 코로나 봉쇄에서 벗어나면서 경기가 활성화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좋았던 시절은 끝났다’는 말이 맞아요. 코스트(비용)도 올랐고, 세계시장도 파편화된 데다 기후위기 등 악재가 겹쳐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이 앞서 간 저출생·고령화의 길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기도 하죠. 성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됐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에 맞춰 정책 설계를 하면서 다가오는 문제들에 대비해야 합니다.”

- 중국 경제 회복이 호재라고 하지만, 가전·휴대폰·화장품 등 한국 제품들이 중국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중국에는 최종 소비재 수출보다 중간재 수출이 훨씬 많습니다. 한국도 중국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산업구조가 업그레이드되면서 중간재 수출 비중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경제도 생물이어서 여기서 막히면 다른 곳이 뚫리곤 합니다.”

- 미·중의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갈수록 뚜렷해집니다. 한국이 세계화의 가장 큰 수혜자였는데, 이제 그 문이 닫히려는 것 같습니다.

“역사를 보면 1차 세계대전 이후 스페인 독감, 하이퍼인플레이션, 대공황, 금융붕괴를 거쳐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는데 지금 다시 이런 극한 대립이 일어나게 되면 인류가 핵전쟁으로 공멸할 겁니다. 국제공조 없이는 기후위기도 해결될 수 없고요. 첨단기술 분야에서 분업구조의 블록화 또는 프렌드쇼어링(동맹국들끼리 핵심 기술의 공유 및 공급망 구축) 경향은 강화되겠지만, 블록화가 마구잡이로 치닫지는 않을 겁니다. 글로벌 가치사슬이 너무나 확산돼 있고 그 이익이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경제도 중국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중국 류허 부총리와 1월 스위스에서 만난 것은 국제금융 분야에서 미·중 협력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디커플링으로 가려는 힘도 강력하지만 국제협력의 필요성도 그에 못지않게 큽니다. 미·중 경쟁은 첨단기술 패권 경쟁 차원에 국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 그렇게 보면 국내에서 디커플링에 대한 공포는 과도해 보입니다.

“지금 상황은 디(de)글로벌라이제이션(탈세계화)이 아니라 리(re)글로벌라이제이션(재세계화)으로 봐야 합니다. 세계시장이 하나가 되고 미국 중심의 금융자본이 리드하던 시대가 2008년 금융위기로 마감한 뒤 포퓰리즘과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됐습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세계화에 대한 반성도 일었습니다. 효율만 중시하다 보니 코로나 때 마스크를 공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충격적이었던 것이죠. 블록경제가 전면화되지는 않고, 첨단기술 분야에서 블록화·클럽화가 진행되는 정도일 겁니다. 미국 재계도 (디커플링으로 인한) 사업 손실을 우려하며 정부에 탄원하는 실정입니다. ‘중국은 끝났으니 한국이 중국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첨단산업 중심의 공급망 재편에는 참여할 필요가 있지만, 국익을 위해 주장할 건 해야 합니다. 다자주의 질서의 유지가 한국의 근본 이익이고, 많은 나라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연대해 이런 원칙을 천명해야 합니다.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등에 참여해 이익을 취할 건 취해야겠지만,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무역 질서도 살려나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유종일 원장은 현재 상황을 한국이 제조업 일변도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매뉴팩처링 의존도를 낮추고 지식·데이터 기반경제로 본격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노력이 필요한데 그중 하나가 ‘증거 기반 공공정책(evidence-based policy)’으로, 공공정책이 데이터에 기반해 치밀하게 짜여질 필요가 있다고 유 원장은 강조했다.

- 한국 대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대거 지으면서 제조업 공동화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제조업 공동화가 걱정이고 피해도 불가피해 보입니다. 하지만 한국이 언제까지나 제조업에만 기댈 순 없고, 이제 큰 그림을 그릴 시기입니다. 한국은 제조 기술에서는 최고 수준이지만, 부가가치가 높은 설계기술, 특히 개념설계 역량은 부족합니다. 지식 기반 서비스를 키워서 이를 바탕으로 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은 이걸 고도화하는 방법론인데 그 핵심은 데이터 활용입니다. 이를 위한 좋은 거버넌스(의사결정구조)를 만드는 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자 혁신경제의 바탕이 됩니다.”

국내에선 기술혁신 중시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경영혁신
공생의 방법 혁신도 미래 위해 긴요…그런 의미서 데이터 활용 높여야

- 혁신경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합니까.

“‘혁신’에는 기술혁신과 경영혁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기술혁신을 떠올리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경영혁신입니다. 한마디로 조직 구성원들 간에 효율적인 분업구조를 만들고 소통과 협력을 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술혁신 이상으로 생산성을 올리는 방법이죠. 기업뿐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첨단산업과 과학기술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혁신하는 것도 미래를 위해 긴요합니다. 이게 공공정책이 담당하는 부분이죠. 경영혁신이나 사회적 혁신, 정책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도 데이터 활용이 중요합니다.”

- 공공정책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뤄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코로나 손실보상, 난방비 지원 같은 사례만 봐도 정책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증거에 기반해야 합니다. 대충 큰 그림만 그려서는 효율적이고 치밀한 정책 설계를 할 수 없습니다. 빅데이터를 활용해 개인 특성에 따른 맞춤형 정책을 도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개인 단위의 미시 행정자료, 전 국민을 포괄하는 행정 빅데이터가 구축돼야 합니다. 북유럽을 비롯해 주요국에서 이런 작업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주민등록번호가 있어 행정자료들 간 연계가 쉽고, 전자정부도 잘 구축돼 있어 잠재력이 큽니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가 전제돼야 하겠죠.”

- ‘증거 기반 정책’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네요.

“정부는 보통 ‘어떤 목적을 위해 예산을 얼마 투입한다’는 식으로 정책을 설명하는데 투입된 예산이 정확히 어떤 효과를 내는지에 대한 엄밀한 데이터 수집과 분석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한국이 선도형 경제로 전환하려면 엄밀한 현실 분석과 정책 효과·효율성의 과학적 평가에 기반한 창의적인 정책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국책연구기관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공공정책 생태계를 선진화해야 합니다. KDI 대학원은 몇 년 전부터 이런 방면의 모색을 해왔습니다.”

증거기반 정책 위한 빅테이터 구축 차원 권한 가진 총괄기구 절실
AI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두터운 사회 만들기 위해 교육이 바뀌어야

한국은 2021년 세계 최초로 데이터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정책은 앞선 편이다. 하지만 산업진흥 차원에서 기업들의 의견을 자꾸 반영하다 보니 독점화 경향이나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 리스크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반면 공공정책 설계를 위한 행정 빅데이터 활용은 과도한 규제 탓에 한계가 많다고 유 원장은 지적한다. “자료 보유 기관들이 데이터 제공에 소극적이고, 특히 국세청도 과세 자료에 대한 접근은 규제가 과도한 편입니다.”

- 윤석열 정부도 데이터 관련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 직속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를 만들었고, ‘인공지능(AI)·데이터를 기반으로 일 잘하는 정부’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증거 기반 정책에 대한 인식은 부족해 보입니다. 행정 빅데이터 구축과 활용을 위해 권한과 책임을 지닌 총괄기구가 필요합니다. 북유럽 국가나 영국은 통계청이, 미국은 인구조사국이 이런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미국은 2018년 증거 기반 정책 기본법이 통과돼 행정 빅데이터 활용이 더욱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 데이터 관련 정책이 국민 경제와 어떻게 연관될까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죠. 제조 기술의 우위만으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데이터 경제는 곧 모든 분야에서 AI를 활용하여 지식 기반 고부가가치 서비스 일자리가 생기는 경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20년 넘게 지식경제를 외쳐왔지만 안 되는 이유가 교육에 있다는 것이 유 원장의 진단이다. ‘AI 쇼크’는 교육개혁 필요성을 재차 환기한다.

- 챗GPT가 나오면서 AI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AI가 사람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AI를 활용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대체할 것입니다. 하지만 로봇밀집도가 세계 최고인 한국에서는 AI가 사람을 대체하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AI 확산이 실업, 격차 확대 등 사회 갈등의 중대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부의 산업정책은 고용을 대체하는 쪽이 아니라 고용 창출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AI를 잘 활용하는 생산성 높은 사람들이 두껍게 자리 잡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이 바뀌어야 합니다.”

- 교육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시험으로 줄 세우고 선별하는 교육에서 실제 필요한 역량을 기르는 역량중심 교육, 그리고 나라가 이를 책임지는 책임교육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모든 학생들이 학년에 걸맞은 기초 역량을 갖추도록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학년 말에 학생들 역량을 평가해서 미달한 아이들은 그냥 진급시키지 말고 특별 관리를 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최소 역량을 갖추도록 교사가 끝까지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주의가 산만하거나 공부가 부진한 학생들에게 교사가 적극 관심을 갖고 가정환경이나 교우관계까지도 살피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학교에서 습득한 역량을 바탕으로 스스로 평생 배울 수 있는 창의적 학습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공공정책 경쟁력 위해 국가정책원 설립 절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장은 인터뷰에서 공공정책 고등교육·연구기관인 ‘국가정책원’ 설립을 제안했다. 유종일 원장은 “2015년 이후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정체되고 있는 원인 중 하나가 공공정책 부문의 낮은 경쟁력”이라며 국가정책원이 이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국가정책원은 과학기술 분야 국가교육기관인 카이스트(KAIST)의 ‘공공정책 버전’인 셈이다.

국가정책원은 정책 인재를 육성하는 역할과 별도로 공공정책 지원에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유 원장은 강조했다. 정책 효과를 높이는 ‘정책 프로세싱’, 국가전략 어젠다 발굴, 부처 간 협업이 필요한 정책 연구, 효과적인 국무조정을 위한 정책 근거 산출 등이다. 정부 업무평가 지원, 정책 조정 및 갈등 관리 등도 기대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문부과학성 소속의 정책대학원대학교(GRIPS)가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다.

국내에서는 KDI 국제정책대학원이 공공전문 정책 연구와 인력 양성을 일부 담당하고 있지만 연구기관 부설 교육기관이라는 한계 탓에 운신의 폭이 좁고 정부 지원도 부족한 실정이다. 유 원장은 “세종시는 중앙부처와 국책연구기관이 밀집해 있고 자치단체들의 접근성이 좋다”며 “국가정책원이 세종에 들어서면 공공정책 클러스터의 구심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서의동 논설위원

서의동 논설위원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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