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韓 배상책임 첫 인정 왜?…위안부 소송도 청신호

김근욱 기자 2023. 2. 7.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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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가족 죽여"…8년간 피해 호소 베트남인, 진술 신빙성 얻어
법원 "국가간 합의해도 개인 소송 가능"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 티탄 씨가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한국 상대 민사소송 1심 선고 공판에서 일부 승소한 뒤 화상 연결 통해 변호인들과 대화하고 있다. 2023.2.7/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서울=뉴스1) 김근욱 기자 =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가족을 잃은 베트남인에게 한국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정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판결로 2015년 한 사진전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약 8년 동안 구체적인 피해 사실을 알린 응우옌티탄씨(63)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실제 재판부는 응우옌티탄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여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한곳으로 모아 총격했다"고 구체적인 피해 상황을 밝히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쟁점이 된 '한·월 군사실무 약정'에 대해 "군사 당국 사이의 합의에 불과해 개인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법조계는 이를 두고 한·일 위안부 관련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의미가 큰 판결이라 짚었다.

◇ "한국군이 우리 가족 죽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7일 응우옌티탄씨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정부가 원고에게 약 30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지난 2020년 4월 소송을 시작한 지 약 3년 만에 나온 첫 결론이다.

사실 응우옌티탄이 한국 땅에서 피해 사실을 알린 건 지난 2015년부터다. 그는 2015년 4월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베트남전 종전 40년 기념 이재갑 사진전'에 참석해 한국 정부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했다.

당시 응우옌티탄은 "가족과 함께 땅굴에 숨어 있었는데 한국군이 수류탄으로 위협하며 나오라고 명령했다"며 "한명 한명 나갈 때마다 한국군이 가족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응우옌티탄은 2018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그는 "죽은 남동생은 한국군이 쏜 총에 입이 다 날아갔다. 남동생이 울컥울컥 피를 토해낼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째서 한국군은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50년이 넘도록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냐"며 눈물을 흘렸다.

베트남전 퐁니퐁넛 사건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 씨(왼쪽)가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촉구를 위한 생존자 기자회견'에서 한국군의 끔찍한 학살 당시 상황을 증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1968년 베트남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의 학살로 어머니, 언니, 남동생, 이모, 사촌 동생까지 다섯명의 가족을 잃은 응우옌티탄씨는 50년 동안 한국군의 어떠한 사과도 없었으며 오히려 군복을 입은 참전군인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며 이들의 진정어린 사과를 요구했다. 2018.4.19/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한국군 학살 확신" vs "인정 못해"

응우옌티탄의 지속적인 요구에도 한국정부는 진상규명 등의 어떤 조치도 이행하지 않았다. 국정원은 민간인 학살 의혹과 관련해 당시 중앙정보부가 조사해 둔 문건을 보여달라는 응우옌티탄 측의 요청도 거절했다.

이에 응우옌티탄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법적 소송을 통해서라도 진실을 밝히겠다는 이유에서다.

정부 측 소송대리인은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가해자가 한국 군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베트남 군인이 한국 군인으로 위장했거나 북한 부대의 개입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응우옌티탄 측은 생생한 증언으로 맞섰다. 실제 베트남 참전 군인 류모씨는 2021년 11월 증인으로 나서 "부대원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한 장면을 무용담처럼 이야기 한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남베트남 민병대 소속으로 학살 현장을 목격한 응우옌득쩌이씨는 2022년 8월 증인으로 나와 "한국군을 여러 차례 식당, 가게 등에서 마주친 적이 있고 한국말을 한 것을 확실히 들었다"며 "분명 (학살한 군인은) 베트콩이 아니라 한국 군인이었다"고 증언했다.

결국 1심 재판부는 응우옌티탄씨의 손을 들어줬다. 직접 법정에 나온 목격자나 참전 군인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 법조계 "위안부 소송에도 영향 가능성"

재판부가 이날 '한·월 군사실무 약정'과 관련된 정부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그간 정부 측은 1965년 한국과 월남 사이에 체결된 한·월 군사실무 약정에 따라 베트남인들이 한국 군인들에 의해 입은 피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군사 당국 사이에 체결된 약정은 기관 사이의 합의에 불과하다"면서 "베트남 국민 개인인 응우옌티탄씨가 대한민국 정부에 소송을 낼 수 있는 권리는 있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을 두고 법조계는 한·일 위안부 관련 소송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의미있는 판결이라 입을 모았다. 김기윤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국가와 국가의 합의를 개인에게까지 적용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법원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다수 계류 중이다. 다만 2015년 한국과 일본이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를 두고 재판부의 판단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반면 구충서 법무법인 제이앤씨 대표변호사는 이번 판결에 대해 "국가 간의 합의가 있었다면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됐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라며 "다소 이례적인 판결이다"고 밝혔다.

ukgeu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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