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누구를 향해 쏜 누구의 총탄인가

김봉규 2023. 2. 7. 18:3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제노사이드의 기억 진주 용산고개

한쪽에서는 푸른색 녹이 슨 허리띠 버클이 발견됐다. 가죽 혁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쇠붙이로 만들어진 버클에 새겨진 한자 고(高)자는 선명하기만 했다. 희생자가 고등학생이었을까, 아니면 동생이나 아들의 허리띠를 차고 있던 어른이었을까. 땅 속에서는 분해되지 않은 플라스틱 단추들이 수없이 나왔다.

학살터 유해 옆에서 발견된 탄두와 탄피는 당시 군·경이 주로 사용했던 M1 소총의 그것들이었다. 탄두는 60년 이상 땅속에 파묻혀 있었고 겉면이 구리성분 이어서 푸른색 녹은 슬었지만, 딱딱한 물체가 아닌 사람의 몸을 관통해서인지 모양새는 흐트러지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반사광을 줄이기 위해 마치 솜털이 무수히 돋아난 것처럼 보이는 검은색 벨벳(Velvet)류 직물을 바탕에 깔고 촬영했다. 가까이 찍기 위해 마이크로(접사)렌즈로 바라보았는데 어린아이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크기의 탄알 하나가 사람 목숨을 희생시켰다고 생각하니 섬뜩함이 밀려들었다. 김봉규 선임기자

‘60년의 어둠 거둬내고 밝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기를. 님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학살터 근처 나뭇가지에 걸린 펼침막이 무심한 듯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진주지역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가 세운 팻말에는 ‘이곳은 한국전쟁(6.25)시 용산리 민간인(국민보도연맹 및 민간인)이 군CIC 및 경찰에 의하여 집단으로 학살당한 현장입니다. 학살 피해자들의 유골이 집단으로 묻혀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았던 2017년 2월26일 찾은 경남 진주시 맹석면 용산고개(진주대로 1999) 제2학살터 유해발굴 현장의 모습이었다. 진주지역에는 총 27곳의 한국전쟁기 학살·매장지가 있다고 진주유족회는 밝히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은 얼었다가 녹아 질퍽해진 흙을 파내고 있었다. 야산 꼭대기 부근 골짜기인 학살터에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목격자들 증언에 따라 땅을 파 내려가자 유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발굴단원들은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과 배를 땅바닥에 댄 채 엎드려 유해를 감싸고 있는 흙을 붓과 대나무 송곳으로 조심스레 긁어냈다. 붓끝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들이 나뭇가지인지 사람의 뼛조각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 자원봉사자는 “사람 유골을 보면 섬뜩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그런 우려와 달리 오랜 세월을 지나 모습을 드러낸 희생자 유해는 그냥 나뭇가지처럼 보였다”라고 말했다.

형태가 반듯하게 남아 있는 안경도 발견됐다. 안경 주인은 총탄에 맞기 전 세상의 무엇을 바라보며 숨을 거뒀을까. 한쪽에서는 푸른색 녹이 슨 허리띠 버클이 발견됐다. 가죽 혁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쇠붙이로 만들어진 버클에 새겨진 한자 고(高)자는 선명하기만 했다. 희생자가 고등학생이었을까, 아니면 동생이나 아들의 허리띠를 차고 있던 어른이었을까.

땅 속에서는 분해되지 않은 플라스틱 단추들도 수없이 나왔다. 머리빗, 칫솔, 약병 등도 적잖이 나왔다. 아마도 끌려가 곧바로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희생자들이 개인 소지품들을 챙긴 것은 아니었을까. 유해 옆에서 발견된 탄두와 탄피는 당시 경찰과 군 헌병들이 주로 사용했던 M1 소총의 그것들이었다. 간혹 현장 지휘관이 쏜 45구경 권총의 것으로 보이는 탄두도 있었다. 60년 이상 땅속에 파묻혀 있어 녹은 슬었지만, 탄두 모양새만은 흐트러짐 없이 보존돼 있었다. 일부 단원들은 학살터 밖으로 퍼낸 흙을 고운 체로 고르고 있었다. 흙을 걸러낸 망 위에서 뼛조각들과 치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학살터 유해발굴 작업선 밖에서는 희생자 유가족들이 발굴현장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단원들의 호미, 붓질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현장을 주시하던 유가족 몇몇은 발굴작업이 잠시 멈추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두며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연신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이도, 쪼그려 앉아 손수건을 눈가에 댄 채 미동도 없이 현장을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사변둥이’(1950년생) 유복자 정연조씨가 경찰에 끌려가 돌아가셨다는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놨다. 정씨는 커서 아무리 공부해도 공무원시험에서 낙방을 거듭한 뒤에야 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아버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단다. “아버지가 보도연맹원으로 억울하게 죽었고, 그제야 연좌제에 걸린 것을 알았죠.” 공무원시험을 포기한 뒤엔 리비아 공사현장에 나가 돈을 벌려 했지만 북한대사관이 있는 나라여서 그마저도 좌절됐다는 정씨는, 혹여 앞길에 걸림돌이 될까 봐 자녀들에게도 할아버지 얘기는 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했다.

학살터 들머리 임시 안치소엔 2014년 1학살지에서 먼저 발굴된 희생자 유해가 안치돼 있었다. 컨테이너 2개를 맞대 세운 안치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른쪽이 함몰된 누군가의 두개골이 눈에 들어왔다. 유해들 대부분은 라면상자보다 조금 큰 노란색 플라스틱 사물함 3백여개에 담겨 선반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뒤엉켜 희생돼 누구의 유해인지 분류할 수 없었기에, 수많은 희생자의 뼈들이 뒤섞인 채 보존되고 있었다.

이런 비극을 불러온 이들은 누구인가. 지난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1국이 펴낸 하반기 조사보고서 ‘국민보도연맹 사건’(320쪽)을 보면, 총살의 주체와 관련해 당시 경찰관의 진술, 유족들의 증언을 통해 경찰과 군,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 특무대(CIC), 미군, 우익단체의 개입 사실이 일부 밝혀졌을 뿐이다. 처참하게 학살당한 수많은 피해자가 있건만 70년이 되도록 가해자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는 셈. 과연 희생자들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