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혁신의 미래, 기본과 기초에 길이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 다녀왔다. 전자·정보기술(IT) 기업은 물론 모빌리티, 농업 회사까지 참여하는 CES는 '가전쇼'를 넘어 '혁신쇼'가 된 지 오래다. CES 변천사를 짚어 보면 산업의 흐름, 글로벌 혁신의 트렌드가 보인다.
소비자 가전(Consumer-Electronics)으로 시작한 전시회가 전 산업 분야를 아우르게 된 것은 '디지털 혁신'이 특정 산업군을 넘어 전 산업에 보편화됐음을 뜻한다. 올해 CES는 디지털 혁신, 기술 진보가 또 다른 길목에 들어섰음을 보여 줬다. 지난해와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비전과 가치 제시'로 요약할 수 있다. 다소 추상적인 미래기술 제시, 획기적인 신기술 과시를 지나 신기술을 어떻게 적용하고 활용할지에 방점이 찍혔다.
CES를 주관하는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는 '모두를 위한 인간안보'(HS4A; Human Security for All)라는 철학적 슬로건을 대주제로 내세웠다. 참여 기업은 앞다퉈 개발하고 있거나 보유한 기술의 '인간적 가치' 홍보에 열을 올렸다. '동행을 넘어 행동'(SK),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삶'(LG) 같은 거대한 철학을 내세웠다. 한편으로는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등 기존에 소개된 신기술을 세련된 서비스로 구현해 보였다. 다양한 가치와 서비스가 백가쟁명이었는데 결국 '인간'이라는 대주제로 수렴됐다.
기술혁신과 인문학의 필연적 만남이다. 올해 CES 개막 하루 전에 열린 삼성전자의 프레스 콘퍼런스는 이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줬다. 삼성전자는 비전과 제품을 설명하는 자리에 빈센트 스탠리 파타고니아 최고철학책임자(CPO; Chief Philosophy Officer)를 등장시켰다. 파타고니아는 윤리경영으로 명성이 자자한 아웃도어 브랜드다. 삼성전자가 개발한 '미세 플라스틱 저감 세탁코스'를 홍보하기 위해 이 회사 임원의 입을 빌렸다. 정확히는 파타고니아와 스탠리, 그리고 'CPO'라는 직함이 갖는 가치와 권위를 차용한 것이다.
CPO는 우리에게 개념조차 낯선 직함이다. 파타고니아가 윤리경영이나 사회공헌 책임자가 아닌 '철학' 책임자를 두는 이유가 중요하다. 파타고니아는 단순히 윤리경영, 사회공헌을 열심히 하는 회사가 아니라 '지향'을 핵심 가치로 한다.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라는 설립자 이본 슈나드의 저서가 설명하듯 이 회사 구성원의 최고 덕목은 자연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스탠리 CPO가 주도한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라는 캠페인 역시 기업 활동이 어떤 식으로든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자성과 자각에서 비롯했다.
삼성전자가 파타고니아 이미지를 단순 차용한 것인지, 이 같은 철학을 실천할 준비가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삼성전자의 기획은 앞으로 혁신이 어떤 모습일지 보여 주는 실마리로 작용한다. 앞으로의 혁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미래 사회는 단순히 혁신적 신기술이 넘쳐나는 사회가 아니다. 혁신가·기업가가 '당신들의 혁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대답할 수 있기를 요구하는 사회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혁신의 최정점에서 인문학을 찾을 수밖에 없다. 기술과 예술, 인문학이 모두 한 뿌리였다는 거창한 설명까지 할 것도 없다. 화두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기 때문이다. 'AI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로봇윤리는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알고리즘의 역기능과 순기능은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제2의 이루다 사태는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피상적으로는 법과 제도 문제일 수 있지만 그 역시 철학의 도움 없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결국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기술 혁신 그 자체도 기본적·기초적 질문과 맞닥뜨린다. 머지않아 도래할 성장의 한계, 혁신의 한계 때문이다. 시장에 나오는 혁신기술 대부분은 기초과학 원리를 활용한 응용기술이자 개발연구 결과물이다. 이런 응용기술 간 경쟁이 포화할 때 혁신의 한계는 다가온다. 이 정체를 돌파할 힘이 기초과학에 있다. 기존과 완전히 다른 선도 기술이 혁신의 새 장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이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이유이자 기초과학이 튼튼한 나라가 선진국이 된 이유다. 지금 우리 기업에도, 국가에도 한계 돌파에 앞장설 '최고과학자'의 역할이 절실하다.
기초과학·기초연구가 기술 정체를 돌파하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든 사례는 많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한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은 유전자에 대한 기초연구가 축적되지 않았다면 탄생하지 못했다. 브라운관에서 액정으로, 다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으로 진화한 디스플레이의 세대 진화 역시 새로운 소재와 물질 연구가 축적됐기에 가능했다. 자연 현상에 대한 탐구, 근본 문제 해결을 위한 도전적 연구는 선도기술을 갖추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우리나라는 올해 CES 최고혁신상 23개 가운데 12개를 휩쓸 정도로 세계가 알아주는 혁신국가가 됐다. 산업계 후발 주자였지만 빠르게 선진국을 추격한 결과다. 그러나 추격국가에서 선도국가로 변모하지 않으면 그 영광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기본·기초에 투자해야 한다. 선도국가는 지금 당장 잘 팔리는 첨단기술 몇 개로는 달성할 수 없다. 지금은 없는 기술, 미래의 표준이 될 수 있는 가치를 먼저 제시하는 국가가 선도국가다. 그러려면 근본적 질문, 근원적 질문에 도전해야 한다.
기본으로 나아가는 길의 이정표를 촘촘히 세우자. 단순히 기초연구 투자를 양적으로 늘린다거나 인문-과학 융합을 촉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방식으로 연구자의 창의성을 높여야 한다. 목표지향적 연구에서도 근본 문제, 세기적 난제에 도전하는 연구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눈앞의 결실을 좇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정을 준비할 때다.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yuseong0413@daum.net
〈필자〉조승래 의원은 노무현 참여정부 행정관·비서관 출신으로, 더불어민주당 재선 국회의원이다. 초선 때부터 정책 역량과 조정 능력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교육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21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간사로 활동하고 있다. 민주당 원내 선임 부대표와 제4정책 조정위원장을 지냈다. 과학기술·정보통신기술(ICT)·게임·문화콘텐츠 같은 미래 먹거리와 일자리, 인재 양성에 관심이 많다. 2020년에 국회 문화콘텐츠 포럼을 만들어 모임을 꾸려 가고 있다. 지난해 세계 최초로 구글갑질방지법 입법을 주도하며 '빅테크 저승사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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