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한글 깨친 칠곡할매시인…자신의 시처럼 곱게 영면에 들어
“먹고 싶은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갈 때 대가(되면) 곱게 잘 가는 게 꿈이다”(박금분 할머니 시 ‘가는 꿈’)
87세에 한글을 깨쳐 시를 쓰고 영화에도 출연해 감동을 선사한 박금분 할머니가 지난 4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4세. 박 할머니는 자신이 쓴 시인 ‘가는 꿈’에서 소망했던 것처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었다. 지난 6일 발인식을 치른 가족들은 “마치 꽃잎 지듯 곱게 눈을 감으셨다”고 전했다.
박 할머니는 그 시절 많은 여성이 겪은 가난과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배움에 대한 갈증을 푼 것은 구순을 바라보는 2015년이다. 경북 칠곡군이 운영하는 약목면 복성리 배움학교에서 박 할머니는 생애 처음으로 연필을 쥐고 글씨를 썼다.
박 할머니는 배움학교에서 ‘인싸’(Insider, 각종 행사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였다. 공부가 끝나면 소주와 요구르트를 섞어 마시는 일명 ‘요소’를 발명해 주변 어르신들과 즐겼다. 1년 동안 폐지를 모아 번 돈으로 함께 공부하는 할머니에게 회식을 베풀어 ‘친절한 할머니’로도 불렸다. 알렉상드르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통째로 외우고 한글을 공부한 종이로 집안을 가득 덮을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컸던 모범생이기도 했다.
박 할머니는 칠곡군이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의 시 98편을 묶어 발행한 시집 ‘시가 뭐고’에 죽음에 대한 성찰을 표현한 ‘가는 꿈’을 선보여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2018년 발행한 시화집 ‘내 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에는 세상을 등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영감’이란 작품을 선보여 호평을 얻었다.
특히 2019년 김재환 감독의 영화 ‘칠곡가시나들’에 출연해 경상도 할매 감성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표현해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만큼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한글을 배웠던 할머니에게 불청객이 찾아왔다. ‘치매’였다. 가족도 알아보지 못 할 때도 많았지만, 잠시 정신이 돌아오면 연필을 잡고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욱 칠곡군수는“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할머니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은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했다”며“칠곡 할머니들의 문화유산을 다양한 콘텐츠로 발전 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한편, 칠곡군은 2008년부터 할머니를 대상으로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3권의 시집과 윤석열 대통령의 글씨체로 불리는 칠곡할매글꼴을 제작했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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