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90년대 프로농구에서 돋보였던 빅맨, 레지 타운젠드

이재승 2023. 2. 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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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2022년 12월 중하순에 작성했으며,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3년 1월호에 게재됐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지금도 그렇지만, 프로농구 초창기의 외국 선수 전력은 중요했다. 외국 선수 정보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을 고려하면, 더 그랬다. 그 시절, 프로 무대를 종횡무진 누볐던 이가 있다. 최고의 팬 서비스를 자랑했던 레지 타운젠드(Reginald Townsend)였다.

 

대학 시절
타운젠트는 세인트조셉대학교로 진학했다. 세인트조셉 호크스는 NCAA A-10(Atlantic 10) 컨퍼런스에 속해 있는 팀이다. NBA 선수도 배출한 바 있다.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중반까지 올랜도 매직에서 주로 뛰었던 자미어 넬슨이 대표적이다. 드와이트 하워드가 올랜도를 이끌 때 넬슨은 주전 포인트가드로 활약했고, 그의 등번호 14번은 세인트조셉대학교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타운젠드는 대학 초년 때 다소 부진했다. 많은 시간을 뛰기 어려웠기 때문. 신입생이던 1992~1993시즌에는 22경기에서 나섰지만, 평균 4.8분을 뛴 것이 전부였다. 활약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경기당 1.4점을 올린 것이 전부였다. 고교 시절 두각을 보이지 못했기에, 1학년부터 많은 역할을 맡기에 한계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자신의 자리를 서서히 확보했다. 1993~1994시즌에 28경기에 나섰고, 그 중 18경기를 주전으로 출장하면서 기회를 잡았다. 프로농구에서 뛰기도 했던 버나드 블런트의 부상으로 인해, 타운젠드에게 기회가 온 것. 

 

타운젠드는 경기당 23.4분을 소화했다. 직전 시즌 대비 출전 시간이 크게 늘었다. 평균 7.6점(2점슛 성공률 : 52.8%, 3점슛 성공률 : 100%, 자유투 성공률 : 63.9%) 3.4리바운드로 골밑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다. 돋보이진 않았으나, 가능성을 보였다.

 

3학년 때부터 주요 전력으로 나섰다. 1994~1995시즌에 29경기 모두 주전으로 나섰고, 평균 30.9분 동안 14.7점(2점슛 성공률 : 58.1%, 3점슛 성공률 : 0%, 자유투 성공률 : 69.0%) 5.7리바운드 1.3어시스트로 활약했다. 팀에서 가장 많은 평균 득점을 올렸으며, 팀 내 두 번째로 많은 평균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러나 세인트조셉은 정규시즌 9승 7패에 그쳤다. 컨퍼런스 공동 4위로 시즌을 마쳤다. 컨퍼런스 토너먼트 첫 관문을 통과했으나, 준결승에서 컨퍼런스를 독식하다시피 했던 메사추세츠 미닛맨에 패했다. 결승 진출에 실패.
 

타운젠드가 졸업반이던 1995~1996 시즌. 세인트조셉은 9승 7패로 컨퍼런스 지구 3위에 올랐다. 그러나 컨퍼런스 토너먼트 두 번째 관문을 넘지 못했다. 16강을 통과했으나, 준준결승에서 무릎을 꿇었다.
 

타운젠드는 이 때 32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출장해 평균 34.6분을 소화하며 14.8점(2점슛 성공률 : 51.2%, 3점슛 성공률 : 100%, 자유투 성공률 : 76.1%) 6.4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올렸다. 평균 득점은 팀에서 가장 많았고, 리바운드 수치도 더 늘었다. 평균 리바운드가 컨퍼런스 8위였다. 그러나 세인트조셉이 토너먼트에 나서지 못했기에, 타운젠트가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긴 쉽지 않았다.

청주에서
대학을 마친 타운젠드는 지난 1997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를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라운드 6순위로 청주 SK(현 서울 SK)의 부름을 받았다.
 

SK는 신생 구단이었다. 토종 선수의 전력이 돋보이지 않았기에, 타운젠트가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모든 경기에서 주전으로 나섰고, 경기당 39분 이상을 뛰었다. 평균 27.4점 11.4리바운드 2.4어시스트로 단연 돋보였다.
 

타운젠트와 타운젠드의 파트너인 드와이트 마이베트가 팀 득점의 2/3를 합작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타운젠드와 마이베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SK는 좀처럼 웃지 못했다. 앞서 이야기했듯, 뚜렷한 국내 전력이 부재했기 때문. 그나마 손규완(현 고양 캐롯 코치)과 윤제한이 힘을 냈으나, 신인이라 기복을 많이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빅맨이 없었다. 그래서 타운젠트의 반칙이 누적되는 날이면, SK는 더욱 고전했다. 그랬기 때문에, 타운젠드는 상대 구단의 주요 공략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운젠트는 SK에서 아주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숱한 외국 선수들이 한국 농구 및 한국 문화 적응에 애를 먹었지만, 타운젠트는 모든 면에서 합격점이었다. 그러나 SK는 이듬해 오프시즌 때 서장훈을 영입했다. 신인 최대어였던 서장훈을 품으면서, SK는 서장훈과 함께 할 수 있는 선수를 선호했다. 타운젠드가 돋보이는 개인 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SK와 함께 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원주에서
SK와 재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던 타운젠드는 이듬해에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나 타운젠드를 부르는 팀은 없었다. 대체 선수 후보로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타운젠드는 좀처럼 한국 무대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99년에 열린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도 지명받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KBL에서 뛰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원주 삼보(현 원주 DB)의 브라이언 리스가 방출을 당하면서, 타운젠드가 기회를 얻었다.
 

SK와 달리, 삼보는 탄탄한 토종 전력을 두루 보유한 팀이었다. 허재(현 캐롯 사장)를 필두로, 신기성(현 SPOTV 해설위원)과 양경민이 포진했다. 여기에 타운젠트가 들어오면서, 삼보가 공격 농구로 힘을 내기 시작했다.
 

타운젠드는 허재를 중심으로 한 삼보에 잘 녹아들었다. SK 시절보다 부담이 줄어들면서, 좀 더 여유 넘치는 플레이를 했다. 기존 선수들과의 호흡이 돋보였다. 또, 남다른 팬서비스로 원주 팬들을 경기장으로 부르는데 일조했다.
 

타운젠드는 간헐적으로 3점슛을 던지기도 했다. 대학 시절만 해도 3점슛과 자유투에 상당히 취약했지만, 1999~2000시즌에는 여러 위치에서 공격을 시도했다. 득점 루트를 다변화하기 시작했다. 3점슛 시도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외곽에서 기회가 날 때면 간혹 3점슛을 던졌다. 내외곽을 오갔기에 타운젠드는 막기 까다로운 선수가 됐다. 삼보 역시 타운젠드의 무난한 안착으로 힘을 냈다.
 

그러나 한계도 뚜렷했다. 타운젠드는 SK 시절 이후 체중 관리를 잘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공수 전환이 다른 외국 선수에 비해 현격히 느렸다.(타운젠드를 향한 평가가 드래프트에서 높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골밑 수비도 문제였다. 미국에서는 주로 포워드로 나섰지만, KBL에서는 센터로 상대 빅맨을 수비해야 했기 때문. 물론, 포워드 출신이라 가로 수비에 장점이 있을 수 있지만, 지나치게 비대하진 몸 때문에 가로 움직임에도 제약을 안았다. 오히려 상대 빅맨이 타운젠드를 여러 차례 흔들었다.
 

특히, 삼보는 당시대전 현대(현 전주 KCC)와 SK를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현대는 조니 맥도웰과 로렌조 홀을 중심으로 안쪽 전력을 단단히 구축했고, SK는 서장훈과 재키 존스라는 막강한 트윈타워에 로데릭 하니발이라는 리그 최고 수비수를 더한 팀이기 때문.
 

반면, 삼보의 빅맨진은 약했다. 타운젠드를 제외한 빅맨이 없었다. 그와 함께 뛰었던 외국 선수는 제런 콥으로 포워드였으며, 타운젠트와 콥의 뒤를 받칠 토종 빅맨이 거의 전무했다. 정경호(현 고양 캐롯 단장)가 자리잡긴 했으나, 정경호는 느린 공수 전환 속도 때문에 큰 이득을 주지 못했다. 상대 외국 선수와의 몸싸움에서도 약했기에, 삼보 벤치는 정경호를 투입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타운젠트가 부상으로 11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보는 3위권을 꾸준히 유지했다. 타운젠드의 공백에도, 삼보가 리그 상위권을 유지했다는 것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끝내 타운젠트의 부상 공백 때문에 한계를 보였다. 1999~2000시즌 정규리그를 4위로 마쳤다.
 

4위였던 삼보는 6강 플레이오프에서 5위인 안양 SBS(현 안양 KGC인삼공사)를 만났다. 그러나 타운젠트가 활약했던 삼보는 플레이오프 첫 관문에서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였다. 타운젠트의 경기력이 부상 이후 온전치 않았기 때문.
 

체중 관리 문제가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부상 이후 회복하는 동안에 뛰지 못했던 것이 타운젠드에게 화근이 됐다. 타운젠드는 SBS의 데릴 프루를 상대로 고전했고, 국내 빅맨이 취약했던 삼보는 SBS의 윤영필을 상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삼보는 1승 3패로 SBS에 밀렸다. 4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대전에서
타운젠드는 1999~2000시즌 종료 후에도 소속 팀과 재계약을 맺지 못했다. 부상 이후 경기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대체 외국 선수로 기회를 잡았다. 다만, 시즌 막판에 KBL로 입성했기에, 많은 경기를 뛰진 못했다.
 

타운젠드를 불러들인 팀은 바로 현대였다. 3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던 현대는 2000~2001시즌에 변화를 도모했다. 맥도웰-이상민(전 서울 삼성 감독)-추승균(현 SPOTV 해설위원)이 중심인 건 여전했지만, 데이먼 플린트가 새롭게 가세했다. 대학 시절 스윙맨이었던 플린트는 현대에서 파워포워드로 나섰고, 기동력과 넓은 공수 범위를 보여줬다. 그러나 높이에서 오는 열세가 컸다. 이로 인해, 현대는 정규리그에서 큰 힘을 쓰지 못했다. 이로 인해, 현대는 6위로 정규리그를 마쳤다.
 

현대는 가까스로 플레이오프에 나섰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팀은 1999~2000 챔피언 결정전에서 마주했던 SK였다. SK는 서장훈의 부상으로 완전한 전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존스-하니발-조상현(현 창원 LG 감독)을 앞세워 3위로 정규리그를 마쳤다.
 

현대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게다가 플린트가 부상으로 플레이오프에 나서지 못했다. 현대는 어쩔 수 없이 대체 선수 물색에 나섰다. 현대의 선택은 타운젠드였다. 그러나 타운젠드는 이전 시즌의 몸이 아니었다. 체중이 훨씬 더 불어난 것처럼 보였다. 경기를 제대로 뛰기 쉽지 않았다. 공수 전환 속도가 느렸고, 시리즈 내내 서장훈이라는 리그 최고의 센터를 상대한 게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다.
 

타운젠드가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일관했다. 맥도웰과 추승균이 분전했으나, 현대는 힘을 낼 수 없었다. 플레이오프에서 2년 연속 SK를 상대로 백기를 들었다. 현대에서의 플레이오프를 끝으로, 타운젠드는 프로농구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사진_ KBL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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