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계점 제품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보존·관리하다니···뒤늦게 등록 말소

도재기 기자 입력 2023. 2. 7. 14:45 수정 2023. 2. 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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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은제 이화문 화병’ 등록 말소
대한제국 유물 아닌 당시 일본 시계점 제품
조사·심의한 정부 기관 전문성·신뢰성 ‘타격’
200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했다가 최근 일본 시계점이 만든 제품으로 확인돼 문화재 등록이 말소된 ‘은제 이화문 화병’(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 가치를 인정해 정부가 특별히 보존·관리하는 국가등록문화재가 뒤늦게 부실한 조사·심의가 드러나 등록이 말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국가등록문화재의 등록 과정에서 유물의 조사와 심의·등록 여부 등을 판단하는 문화재위원회 위원들, 문화재청 행정의 전문성·신뢰성이 타격을 받은 것이다. 학계에서는 ‘백자 동화 매화·국화무늬 병’ 등 국보로 지정했다가 취소된 과거 사례 등을 거론하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전문성 제고와 재발 방지책 마련을 촉구했다.

국가등록문화재인 ‘은제 이화문 화병(銀製 李花文 花甁)’이 최근 국가등록문화재에서 등록이 말소된 것으로 7일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이날 “200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한 ‘은제이화문화병’의 등록말소 관련 내용을 최근 관보를 통해 고시하고 2월3일자로 등록 말소했다”며 “문제의 문화재가 대한제국 당시 이왕직미술품제작소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 도쿄의 고바야시토케이텐(小林時計店)의 제품으로 드러나 등록을 말소하게 됐다”고 밝혔다.

대한제국 황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판단해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한 유물이 사실은 일본 도쿄의 한 시계점에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현재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은제이화문화병’은 목이 길고 몸통 쪽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태의 1910년대 유물로, 대한제국의 황실 문장인 오얏꽃(李花·이화) 문양이 붙어 있다.

문화재청은 2009년 ‘은제이화문화병’을 등록문화재로 등록할 당시 문화재위원회 전문가들의 조사·심의를 바탕으로 “황실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을 제작하기 위해 설립된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1910년대에 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등록 이후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문제 제기가 있었고, 지난해 재조사에서 일본 고바야시토케이텐 제품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문화재청은 “유물 바닥에 찍혀 있는 ‘小林(고바야시)’이란 글자 등 재조사 과정에서 이왕직미술품제작소가 아니라 고바야시토케이텐의 제품으로 확인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바야시토케이텐은 당시 일본의 은제 공예품, 장신구 등을 제작한 유명한 시계점이자 미술품제작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연히 등록 기준과 절차 등에 따라 문화재위원 등 전문가들이 해당 유물의 형태와 제작 기법, 보존상태 등을 조사·심의했고 이를 근거로 등록문화재로 최종 등록됐다”며 “당시 등록 과정에서 철저하고 세밀한 조사와 심의가 이뤄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문화재위원을 지낸 한 공예전문가는 “이번 등록 말소는 한마디로 전문가들과 문화재청의 치밀하지 못한 부실 조사와 전문성이 부족한 결과”라며 “단순히 오얏꽃 문양 등을 근거로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유물로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고위 관계자는 “ ‘은제이화문화병’은 국가등록문화재에서 말소됐으나 일단 소장처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관리할 예정”이라며 “앞으로 국가등록문화재는 물론 국보,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 등 문화재의 지정·등록과 관련해 더욱 철저한 조사와 심의·검증, 전문성 등을 제고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등록 말소와 관련, 학계 전문가들은 ‘보물 중의 보물’로 불리며 국보로까지 지정됐다가 지정이 취소된 사례를 언급하며 재발 방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국보로 지정돼 특별한 보존과 관리를 받던 ‘백자 동화 매화 국화무늬 병’은 국보 지정 40여년 만인 지난 2020년 원나라 시대 자기로 드러나면서 문화재청은 국보 지정을 해제했다.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지난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국가지정문화재 국보인 ‘백자 동화 매화·국화무늬 병’을 국보에서 지정 해제했다. 화려한 문양과 균형미가 돋보이는 조선 초기의 명품으로 문화재위원회가 인정해 1974년 국보로 지정했으나 뒤늦게 원나라 시대의 백자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당시 원나라 자기인데다, 다른 비슷한 유물들의 가치와 비교해서도 국보로서의 자격이 크게 떨어진다는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에 따라 지정을 해제했다.

지난 2010년에는 역시 국보로 지정돼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이형 좌명원종공신녹권 및 함’이 국보에서 보물로 강등되기도 했다. 국보로서의 적격성이 낮아 오히려 보물로의 지정이 맞다는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결과를 수용한 것이다.

국보에서 보물로 등급이 내려 앉은 ‘이형 좌명원종공신녹권 및 함’. 문화재청 제공
거북선에서 사용된 대포라며 국보로 지정했다가 가짜로 드러나 지정을 취소한 ‘귀함별황자총통’(일명 ‘거북선 총통’).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짜 유물을 국보로 지정했다가 취소한 사례도 있다. 19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귀함별황자총통’(일명 ‘거북선 총통’)이다. 발굴 당시 문화재위원회와 전문가들이 거북선에서 사용된 포로 인정하면서 전국적인 주목과 화제를 모았고 결국 국보로 지정했다. 하지만 국보 지정 4년 뒤인 1996년 조사 과정에서 가짜로 드러나 국보 지정이 해제됐다.

문화재위원을 지낸 원로 학자는 이날 “전문가들의 가치 판단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문화재의 지정, 등록 과정에서 더욱 철저한 조사와 연구, 심의와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며 “부실한 조사와 심의가 초래한 이번 ‘은제이화문화병’의 등록 말소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전문가들과 문화재 행정의 반성과 각성은 물론 전문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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