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에 귤 파는 어르신 따뜻한 방에서 쉬게 해주세요” 기도[사랑합니다]

2023. 2. 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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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합니다 - 노점상 할머니
영하 12도까지 떨어졌던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신사역 부근에서 노점상을 하는 한 할머니가 추운 날씨 속에 귤을 팔고 있다. 필자 제공

영하의 서울 밤거리, 좌판에 소복소복 담긴 귤이 찬바람에 아프다. 할머니는 석고상처럼 미동도 없다. 누가 말을 걸지 않아도 입은 저절로 달그락거리고 단물이 빠져나간 슬픔은 으슥한 밤공기에 귀를 닫는다. 올해도 1월은 바람보다 먼저 흔적을 지우고 2월의 낯선 시선들이 오가는 정거장은 그들만의 하얀 입김이 맴돌 뿐, 누구 하나 할머니를 쳐다보지 않았다. 족히 90세는 돼 보이는 얼굴, 주름이 반지하 계단처럼 쿰쿰하게 흘러내린 얼굴, 한기를 이겨내려 목도리를 동여맨 저 슬픔은 누가 외면한 이 시대의 그늘일까. 나는 가다 말고 뒤돌아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이거 한 바구니에 얼마예요?” 하고 묻자 할머니는 웅크렸던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검은 비닐봉지에 귤을 담는다. “5000원, 잡숴봐! 달아”하시며 귤 하나를 먼저 주신다. 나는 귤을 받아 들며 “할머니, 내가 산다는 말도 안 했는데 먼저 담으시면 어떡해요?” 하자 할머니는 “아녀, 살 것 같어. 내가 다 알어” 하시며 “식구가 많으면 한 바구니 더 사?”라고 하신다.

나는 귤 하나를 까먹으며 좌판에 놓인 귤을 눈짐작으로 계산해 보았다. 대략 5만 원쯤 돼 보였다. “할머니, 귤 제가 다 살 테니 집에 들어가세요! 너무 추워요” 하며 5만 원권 지폐를 꺼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녀, 이거 하나만 더 사”라고 하시며 사양하신다. 나는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할머니, 빨리 팔고 들어가시는 게 좋지 추운데 왜 고생하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먹을 만큼만 사야지. 많이 사서 버리면 못써. 어여 가. 괜찮아!” 그러고는 1만 원만 받으신 후 덮었던 담요를 끌어 무릎을 덮고 다시 석고상이 되신다.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귤 두 봉지를 들고 돌아섰다. 돌아가는 걸음걸음 “어여 가 괜찮아”하신 할머니 목소리가 별과 별 사이를 건너는 징검돌처럼 푸르게 따라왔다. 며칠 후 다시 그 할머니를 만났다. 나는 반가워 “할머니, 저 기억하세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비스듬히 뉜 몸을 일으키며 “알지. 귤 두 봉지 사 갔잖어. 자꾸 다 사겠다 떼 쓰구….” 나는 너무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할머니 그걸 어떻게 기억하세요? 연세도 많으신데.” 그러자 할머니는 귤 상자 안에서 성경책을 꺼내어 나에게 주었다. 얼마나 읽으셨는지 표지가 심하게 낡아 ‘큰 글자 성경’이라고 쓰인 흔적을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라고 묻자 “내 기억력은 다 여기서 나왔어”라 하신다. 성경책을 읽으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아무리 추워도 따뜻하다 하시며 지금은 눈이 안 보여 읽을 수가 없어서 늘 가슴에 안고 다닌다 하셨다. 순간, 욕심 많은 40대 초반 나의 인생 설계는 여지없이 총 맞은 기분이었다. 할머니는 웃고 계셨다. 나는 울컥 할머니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놀라 나를 쳐다보시며 “귤을 사야지 왜 내 손을 잡는디야.”

서러움도 아픔도 없는 따뜻한 할머니 손, 사람들은 예수요 부처를 왜 먼 데서 찾을까. 나는 귤 한 봉지를 사 들고 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했다. 지난번 귤을 먹을 만큼만 사라는 것도, 음식을 버리면 안 된다는 것도, 어쩌면 성서적 복음이 아닐까. 추위를 마다치 않고 도심의 밤거리에서 절제의 교훈을 주신 저 청빈은 바로 한 줄 경전이 아닐까. 할머니의 여운은 오랫동안 내 마음의 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날이 죄송스러웠다. 전세를 살다 집을 샀다고 좋아서 춤을 추던 어제가, 회사 일이 많다고 투정부린 어제가, 열 살배기 딸과 해외여행을 꿈꾸던 시간들이 모두 이 할머니 손바닥에서 놀고 있었음에 나는 더없이 작아졌다. 바람이 차갑게 스치는 정월 대보름 밤, 쟁반같이 둥근 달을 보며 나는 기도했다. “하느님, 저는 성경을 몰라요. 그러나 할머니는 진정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저 겨울바람 속에 귤을 파는 할머니를 구원하시어 따뜻한 방에서 편히 쉬게 해주세요. 아멘.” 나의 허튼 기도가 우스웠는지 시린 귤들이 주렁주렁 몸을 흔들며 웃는다.

발산동 지안이 엄마 한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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