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챕터 통째로 불타 사라졌어도 매입… 헌책 속 흔적, 내겐 즐거운 추리 소재”

나윤석 기자 2023. 2. 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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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서울 은평구의 한 작은 건물.

"책 속 흔적은 헌책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별한 보물입니다. 평범해서 값진 독자의 이야기가 남는 순간이야말로 책이 가장 '책다워지는' 순간입니다."

예컨대 무명작가 콜린 윌슨을 문단의 '인싸'로 만든 비평서 '아웃사이더'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 도착했을 때 한 챕터가 통째로 불에 타 사라져 있었다.

'헌책 낙서 수집광'에는 문자메시지도, SNS도 없던 시대 수신인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흔적도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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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 낙서 수집광’ 출간 윤성근
“독자 사연 간직한 작은 낙서들”
15년간의 수집·추리 기록 담아
서울 은평구의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는 윤성근이 최근 출간한 ‘헌책 낙서 수집광’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윤슬 기자

6일 서울 은평구의 한 작은 건물.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오르자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검정 마술 모자에 넥타이 차림을 한 그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인 윤성근. 단골손님들은 그를 ‘이야기를 수집하는 책 탐정’이라 부른다. 손글씨와 편지, 메모로 가득한 ‘낙서 책’을 수집해 셜록 홈스처럼 책에 얽힌 누군가의 사연을 추리하는 취미 때문이다.

‘헌책 낙서 수집광’(이야기장수)은 벌써 15년에 이른 수집과 추리의 기록이다. 때로는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 같고, 때로는 다정한 러브스토리 같은 사연들 위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에리히 프롬의 ‘자기를 찾는 인간’ 등의 책 이야기가 얹어진다. 2021년 출간돼 6쇄를 찍은 윤성근의 전작 ‘헌책방 기담 수집가’를 흥미롭게 본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가 제안해 시작한 프로젝트다. 윤성근은 “기묘하고 감동적인 사연을 찾는 이야기 수집가와 이야기장수의 만남은 절묘한 운명처럼 여겨졌다”고 말한다. “책 속 흔적은 헌책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별한 보물입니다. 평범해서 값진 독자의 이야기가 남는 순간이야말로 책이 가장 ‘책다워지는’ 순간입니다.”

다른 서점이라면 ‘매입 불가’ 판정을 받았을 책도 이곳에선 추리를 부추기는 보물이 된다. 예컨대 무명작가 콜린 윌슨을 문단의 ‘인싸’로 만든 비평서 ‘아웃사이더’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 도착했을 때 한 챕터가 통째로 불에 타 사라져 있었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를 다룬 챕터였다. 게다가 책 뒤표지에 등장하는 여러 작가 사진 중에서 유독 도스토옙스키의 초상에만 붉은색 ‘X’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윤성근은 수수께끼 같은 이 헌책의 비밀을 드러낼 ‘단서’를 도스토옙스키의 사생활에서 찾았다.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알코올 의존증과 도박중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도박 빚을 갚으려 시작도 하지 않은 소설 원고료를 미리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으니까요. 방탕한 삶이 작품의 원동력이었음을 비꼬는 마음이 훼손된 책에 숨어 있는 것 아닐까요.”

‘헌책 낙서 수집광’에는 문자메시지도, SNS도 없던 시대 수신인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흔적도 배어 있다. 1999년의 어느 날 한 엄마는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수록된 ‘질투는 나의 힘’을 읽고는 아들에게 편지를 띄운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라는 시구 옆에는 공장 부속품이 된 듯 고달팠던 시집살이 경험을 적고,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라는 시구에선 남편을 처음 만난 시절을 떠올린다. 시집을 덮은 윤성근은 “오늘은 엄마에게 전화를 드릴까 하다 전화기를 내려놓았다”고 말한다. “엄마 목소리를 듣는 것도 좋지만, 이번엔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누군가가 남긴 흔적이 일상에 영향을 미칠 때 ‘책으로 이어진 인연의 끈’이 있음을 느낍니다.”

윤성근은 ‘헌책 낙서 수집광’을 읽을 독자를 위해 책 속에 옛날 작은 서점에서 나눠주던 ‘실코팅 책갈피’를 넣어두었다. 책갈피 뒷면엔 에리히 프롬 책 속 메모가 고색창연한 글씨체로 인쇄돼 있다. “인생은 한 잔의 ‘One black coffee’라고 생각됩니다. 한 숟갈 한 숟갈의 설탕을 타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에 남은 흔적에서 먼 옛날 독자의 마음을 짐작하는 책 탐정은 바란다. ‘헌책 낙서 수집광’을 펼친 이의 삶이 그저 씁쓸하지만은 않기를. 달콤한 설탕의 맛이 함께하기를. 이 책도 사람의 흔적을 안고 멀리, 오래 여행하기를.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적힌 어느 독자의 메모.
에리히 프롬 책에서 발견한 어느 여성 독자의 연애 편지.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 담긴 감성 넘치는 독후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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