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달러는 가능할까…브라질-아르헨 ‘공동통화’ 논의 시동

박병수 2023. 2. 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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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페르난데스 대통령 “함께 노력” 공동발표
성사되면 세계경제 5% 규모 새경제권 탄생
“두 나라 경제상황 너무 달라” 회의적 시각 많아
10월 아르헨 대선에 영향 미칠 가능성도 촉각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왼쪽부터)과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키르치네르 문화센터에서 열린 음악회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실 제공/AFP 연합뉴스

남미의 두 대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달러 없이 양국 간 무역을 할 수 있을까. 두 나라가 양국 간 교역에 사용할 ‘공동통화’를 만들어 달러 대신 결제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그 실현 가능성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두 나라의 공동통화 창설 구상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과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지난달 22일 신문 기고문을 통해 “금융과 상업 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남아메리카 공동통화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하며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룰라 대통령은 이튿날 페르난데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뒤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공동통화가 처음엔 두 나라 사이에 사용하다가 나중에 정착되면 ‘메르코수르’ 경제공동체 회원국들도 참여해 사용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야심 찬 구상도 밝혔다. 메르코수르는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파라과이·베네수엘라 등 5개 나라가 참여하고 있는 남미 지역의 관세 및 경제 협력체이다.

이 구상대로 공동통화가 도입되면 남미에 대략 세계 총생산량(GDP)의 약 5%에 이르는 공동 경제권이 출현한다. 현재 유럽연합 27개 국가로 구성된 유로존(13%)에 이어 두번째로 큰 경제권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어서, 세계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두 나라는 자신들이 구상하는 공동통화가 유럽연합(EU)의 단일통화인 ‘유로’와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유로는 1999년 도입 뒤 마르크(독일)와 프랑(프랑스), 리라(이탈리아) 등 개별 회원국의 기존 화폐를 완전히 대체한 ‘단일통화’가 됐다. 이들이 추진하는 ‘공동통화’는 브라질의 헤알과 아르헨티나의 페소를 대체하지 않는다. 이 돈은 두 나라 사이의 국제 거래에만 사용되며, 국내 거래에서는 지금처럼 헤알과 페소가 쓰인다.

과거 공동통화 추진, 모두 실패

남미에서 공동통화 계획이 추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0년대 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가우초’(gaucho)란 이름의 공동 결제수단이 논의됐고, 2019년에도 자이르 보우소나루 당시 브라질 대통령과 마우리시오 마크리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페소-헤알’ 공동통화 추진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이 구상은 실현되진 않았지만 최근까지 꾸준히 거론돼왔다. 2019년 보우소나루 정부에서 공동통화를 추진할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파울루 게지스는 지난해 다보스 포럼에서도 이 통화가 남미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페소-헤알’ 구상을 옹호했다. 현재 룰라 정부의 재무장관인 페르난두 아다드도 지난해 ‘수르’(Sur·남쪽이란 뜻의 스페인어)라는 이름의 공동통화 창설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했다. 또 2015~2018년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장을 지낸 페데리코 스투르세네헤르는 메르코수르 공동체의 통화정책을 위한 중앙은행 설립을 주장한 바 있다.

브라질의 경제수도 상파울루 모습. 2월3일 촬영. AP 연합뉴스

남미에서 공동통화 창설 구상이 끊이지 않은 것은 이 화폐가 경제 협력과 통합을 촉진할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현재 전세계 국제 무역에서 달러 의존도는 거의 절대적이다. 달러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남미 지역 내 국가 간 거래도 결제수단 부족으로 타격을 받는다. 실제 남미 지역은 과거 여러차례 외환위기의 여파로 교역 규모가 쪼그라드는 경험을 했다. 고질적인 경제 위기에 빠진 아르헨티나 등에선 이런 상황이 현재 진행형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지난해 교역 규모는 약 300억달러(37조원)로, 10여년 전 약 400억달러(49조원)보다 크게 줄었다. 여기에 아르헨티나의 만성적인 외환위기가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두 나라 사이에 달러를 대신할 결제수단이 생기면 적어도 달러가 없어 교역을 못 하는 경우는 피할 수 있다.

공동통화는 국제거래를 위해 자국 화폐를 달러로 바꾸는 데 드는 환전 비용도 줄일 수 있다.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의 1위 무역 상대국으로 아르헨티나 전체 무역의 15.1%를 차지한다. 아르헨티나는 중국과 미국의 뒤를 이어 브라질의 3위 무역 상대국으로 전체 무역의 4.7%를 차지한다. 두 나라 모두 적어도 그만큼 환전 비용을 아낄 수 있고, 국제 환율이 요동침에 따라 발생할 환차손도 피할 수 있다.

두 나라 거시경제 차이 너무 커

그렇지만 공동통화의 앞길엔 ‘산 넘어 산’이 도사리고 있다. 공동통화 도입을 위해선 먼저 두 나라 간 기준금리와 환율 등 거시경제지표 조정을 위한 긴밀한 재정·통화 정책 협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두 나라의 경제지표가 워낙 크게 달라 이를 조율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통화가치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기준금리의 경우 아르헨티나는 무려 75%나 된다. 브라질은 그 5분의 1인 13.75%이다. 두 나라의 기준금리 차이는 무려 60%포인트를 넘는다. 다른 거시지표들도 마찬가지다. 아르헨티나는 2020년 건국 이래 아홉번째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40억달러를 긴급 지원받는 상황에 몰리는 등 외환보유고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브라질은 아르헨티나보다 8배나 많은 2939억달러의 외화를 갖고 있다. 물가도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94.8%나 폭등하며 초인플레이션에 시름하는 반면, 브라질 경제는 올해 0.8% 성장으로 성장 둔화가 예상되지만 지난해 물가상승률을 5.75%로 억제하는 등 상대적으로 건실하다.

두 나라 사이에는 무관세 등 자유무역도 제대로 활성화되어 있지 있다. 두 나라 모두 메르코수르 공동체 회원국이지만, 실제 무관세이거나 낮은 관세가 적용되는 물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는 유럽이 유로 도입에 앞서 몇십년 동안 관세 협력과 유럽통화제도(EMS) 등 긴밀한 정책 협의를 거치며 사전 정지 작업을 해왔던 전례와 크게 비교되는 대목이다. 투자정보업체 텔리머의 하스나인 말리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통화동맹에 필요한 경제 정책과 상황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평가했다. 일부에선 무리하게 공동통화를 추진하면 아르헨티나의 외환위기 등 경제난이 브라질로 전이되는 부정적인 효과만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학 교수는 두 나라의 무역 규모와 산업구조의 차이점을 들어 공동통화는 “끔찍한 아이디어”라고 혹평했다. 그는 얼마 전 트위터를 통해 “공동통화는 서로 주요한 교역 상대국으로 대규모의 비대칭적 충격에 직면하지 않을 만큼 규모가 비슷해야 한다”며 두 나라가 이런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아르헨티나가 주로 농산물을 수출하는 데 비해 브라질은 연료와 제조업 상품을 주로 수출한다”며 “세계 경제에 충격이 가해지면 균형실질환율에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아르헨티나 지폐 ‘페소’. 2018년 8월30일 촬영. 로이터 연합뉴스

이에 대해 세르히오 마사 아르헨티나 경제장관은 “이제 남미 지역이 먼 길을 가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이라며 섣부른 평가를 경계했다. 그는 당장 도입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두 나라가 중앙은행의 역할이나 재정정책 조율 등 핵심적 이슈를 둘러싼 연구와 협의를 거쳐 추진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미 경제권 통합이 룰라의 목표

이번 공동통화 구상은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지만 정치 쪽 반응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전했다. 남미 경제의 긴밀한 협력과 통합을 통해 지나친 달러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룰라 대통령의 정치적 의지를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핀테크 기업 ‘우알라’ 창업자인 피에르파올로 바르비에리는 “브라질은 더 큰 수출시장과 낮은 교역장벽을 원한다”며 공동통화가 이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궁극적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공동통화 구상 발표는 취임 한달도 안 된 룰라 대통령이 첫 해외 나들이로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자리에서 발표됐다. 이런 중대한 문제가 긴 협의 없이 합의되어 조기 발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두 나라의 정상이 모두 좌파 정치인이라는 연대감이 깔려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는 10월 아르헨티나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는 점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아르헨티나는 최근 외환위기에 살인적인 물가고로 경제 사정이 매우 안 좋다. 뼈를 깎는 긴축과 재정 개혁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지만 실제 개혁은 지지부진하다. 공동통화 추진은 경제난 해소에 도움을 줄 것이란 기대를 불러일으켜, 집권 세력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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