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를 걷다 울산 가지산] 칼바람이 사정없이 귀싸대기 날렸다

강윤성 2023. 2. 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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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최고봉인 가지산에 오르면 멀리 수평선을 이룬 동해까지 장엄한 풍광이 거침없다. 태백에서 내달려온 낙동정맥이 영남에 이르러 1,000m급의 큰 산군을 이루는데, 이를 영남알프스라 칭한다.

"-15℃, -17℃, -10℃, ……, -5℃, 4℃"

전국에 한파가 덮친, 41년 만에 가장 추운 날이라는 서울을 벗어나 경남 울산 가지산으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외기온도는 천안에서 영하 17℃ 최저치를 기록한 후 경남권에 들어서면서 대폭 상승했다. 천안에서 일출을 맞은 후 울산에 도착할 즈음 해가 중천이었음을 감안해도 새벽과 한낮의 일기차가 생각 외로 컸다. 충청권까지 산자락에 수북하게 쌓였던 눈이 경남권에 진입하면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울산에 진입하자 흰 눈을 뒤집어 쓴 영남알프스의 1,000m급 산들이 장대한 산줄기를 이루며 압도했다. 그중 영남알프스 최고봉인 가지산의 멧부리가 유독 살벌하게 치솟아 있다. 마치 히말라야의 거친 설산을 보는 듯했다.

석남사 계곡 전경. 계곡 초입에 비구니수련도량인 석남사가 자리하고, 상북면과언양읍을 감싸 안은 고헌산 너머로 동해가수평선을 이룬다.

칼바람 몰아치는 영남알프스 최고봉

가지산 기점이 되는 석남사 주차장에 들어섰다. 주차된 차는 달랑 1대뿐, 주변 상가도 덩달아 썰렁했다. 주차 관리원에게 가지산 들머리인 석남터널 가는 교통편을 물었다.

"여기 석남사는 대중교통도 거의 없고 택시도 안 다닙니다. 택시 호출하면 언양에서 오는데 미터 요금은 안 되고 20분쯤 걸립니다."

낭패였다. 천년 사찰 석남사石南寺 앞에 택시 한 대 없다니….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잠시 고민 끝에 곧장 주차장을 빠져나와 석남터널로 향했다. 동계산행에서 시간은 생사를 좌우할 수 있다. 주차비 2,000원이 한순간에 홀랑 날아갔다. 환불이 안 돼 정보료를 낸 셈 쳤다.

가지산에서 능동산을 잇는 낙동정맥을 관통하는 석남터널을 오르기 위해 여러 번 산허리를 가로질러 달렸다. 터널 앞 휴게소에 도착하자 10여 개의 식당이 불야성을 이뤘다. 대낮인데도 전등이 휘황하게 켜 있고, 상가 앞 갓길까지 이미 만차다. 주차 자리가 마땅치 않아 터널 반대편으로 이동해 차를 세웠다.

"이 한파에도 가지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네요."

"영남알프스 9봉 인증을 위해서 온 등산객들이 많나 봐요."

중봉을 내려서는 등산인 너머로 가지산정상 암봉이 불끈 솟아 있다. 주능선 맨우측의 바위는 가지산의 백미라 불리는쌀바위다.

억새 평원으로 유명한 영남알프스는 낙동정맥이 태백에서 부산을 향해 내달리다 울산에 이르러 빚은 큰 산군이다. 1,000m급 산만 해도 아홉 개에 이르는데 이를 영남알프스라 칭한다. 울주군에서 2020년부터 야심차게 실시한 '9봉 정상 인증 은화 증정' 이벤트는 이곳 산군을 단번에 전국에서 가장 핫한 곳으로 만들었다. 그렇다 해도 평일 동계에 가지산에 사람들이 붐빌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영남알프스 9봉 인증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명 '등린이'들이 많은데, 기상이 불순한 때의 동계산행은 위험에 노출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석남터널에서 꽁꽁 얼어붙은 지계곡 옆의 가파른 계단을 헐떡이며 올랐다. 추위와의 사투를 위해 옷을 꽁꽁 껴입은 탓에 온몸이 금세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옷을 벗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석남터널 능선 위쪽에서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강풍 소리가 귀청이 터질 듯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가지산과 능동산을 잇는 석남터널 위 낙동정맥 마루금에 올라섰다. 한순간 강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몸이 휘청했다. 다행히 길이 능선 왼편에 나 있어 바람이 머리 위로 비껴갔다. 바람이 들지 않은 햇살 좋은 곳에 앉아 다리쉬임과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을 때 젊은 연인과 두세 명의 등산객이 앞질러갔다.

"영남알프스 9봉 정상 인증을 위해 오르는 부부 같은데, 남자 분이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네요."

"산에선 패션보단 안전이 우선인데, 아웃도어 업체에서 MZ세대 등린이 패션만을 강조하다 보니…."

쌀바위 능선을 돌아 나오니 '산악인이규진 추모비'가 눈길을 끈다. 쌀바위 실제크기는 사진 속 바위의 10배가 넘는다.

빙판길과 강풍에 산행 포기한 등산객 속출

산중의 기온은 어느새 영하로 낮아졌고, 초속 15m쯤 되는 칼바람은 체감온도를 영하 20℃ 아래로 뚝 떨어뜨렸다. 게다가 등산로는 온통 눈과 얼음 범벅인 바윗길이었다.

울창한 철쭉나무군락지를 지나 가파른 숲 사면에 설치된 사다리처럼 놓인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조망이 시원스럽게 트였다. 수려한 암릉이 어우러진 능선 아래로 언양읍이 아스라하게 내려다보이고, 나지막한 산들 너머로 수평선을 이룬 동해가 가뭇하다.

석남고개에서 뻗어 오른 산줄기는 중봉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섰다가 가지산 정상을 거쳐 북동쪽으로 나선형으로 휘어지며 하늘금을 긋고, 동남쪽에 석남사를 품고 있다. 영남알프스에서 가장 가파르고 억센 산줄기가 능선 우측으로 펼쳐졌다.

가파르게 치솟은 눈 덮인 중봉이 눈앞에 다가왔다. 가지산 정상으로 착각할 만한 위세 등등한 형세다. 정상에 올라서니 능동산을 거쳐 천황산과 재약산에 이르는 산줄기가 뻗어나가고 사방에서 산들이 첩첩이 솟아 있다.

그때 칼바람이 사정없이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바람을 피할 곳이 없어 얼른 정상에서 벗어났다. 북사면의 얼어붙은 바윗길에는 앞서갔던 남녀가 밧줄을 잡은 채 내려서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다. 가파른 빙판구간이라 내려설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때 아내가 필자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도와줄 건가요?"

"아니, 지금 차라리 포기하고 하산하는 게 오히려 안전할 거야. 이 구간을 넘어서면 오도 가도 못할 수도 있는데…."

쌀바위 인근의 암봉을 오르는 등산인너머로 울산의 산들과 동해가 펼쳐진다.

안부에 내려선 후 뒤돌아보니 그 연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안부를 지나 정상을 홀로 오르던 한 중년의 남자도 산행을 포기하고 되돌아섰다. 석남고개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배낭의 허리벨트는 여전히 매지 않았고, 바람막이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저체온증을 우려해서였을까. 어떤 연유에서였든지 위험을 무릅쓰고 과욕을 부리지 않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가지산 정상을 향해 힘찬 암릉이 곧장 뻗어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말끔하게 솟은 우람한 암봉이다. 오르막에 보이는 조망은 영남알프스의 최고봉답게 사방팔방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산 아래 비구니 수량도량 석남사까지 곧장 내리꽂은 시선은 가지산을 둘러싼 너울거리는 산들을 향해 까마득하게 멀어지다가 하늘 끝 수평선에 닿았다. 사방으로 조망이 툭 트이는 광대한 풍광이다. 마치 하늘길을 걷는 듯 정상에 섰다.

"가지산 조망이 참으로 거침없네요. 이렇게 장엄한 풍광이 흔치는 않는 것 같아요."

가지산 정상석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섰고, 그들은 동서남북으로 거침없이 펼쳐지는 파노라마에 몸을 맡기고 온갖 포즈를 연출하며 사진을 찍었다.

정상에서 운문령을 향해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의 눈 덮인 거친 잡목 숲을 한참 헤치고 나아갔다. 도중에 중년의 부부를 만나 길을 비켜주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때만 해도 그들이 동아줄이 되어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불끈 솟은 쌀바위 전경. 과욕을 징계하는우리 민족의 미혈설화가 깃든 바위다.석림을 이룬 하얀 바위들의 모습이 선경을방불케 한다.

미혈설화 깃든 쌀바위엔 석간수만 흘러

바위 능선을 우회하자 한참 후 쌀바위가 불쑥 튀어나왔다. 높이를 가늠하려고 내려다보니 바닥이 까마득했다. 바위 앞에는 '산악인 이규진 추모비'가 서 있는데, 비문에는 '정녕 산인가 도전하는 맥박인가, 큰 한 웃음을 옥류골에 묻어 놓고'라고 쓰여 있다. 상북면 출신의 산악인 이규진은 1972년 가지산우회를 창립하고 울산 최초의 면지인 <헌남> 등산 안내 편에 가지산을 비롯한 5곳의 등산 지도를 제작하는 등 산악활동에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비석은 가지산우회에서 사후에 그를 추모하며 세운 것이다.

쌀바위는 가지산의 백미白眉일 정도로 풍광이 아름답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바위가 하얀 쌀톨白米 모양으로 솟아 있다. 산 아래 어디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우람한 바위다. 쌀바위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쌀바위 아래에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던 스님은 먹을 양식을 산 아래 마을에서 시주를 받았다. 하지만 어느 날 바위틈에서 흰쌀을 발견한 스님은 마을에 내려가지 않고 더욱 수도에 정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래 마을에 큰 흉년이 찾아 들었고, 스님이 시주를 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스님을 찾아가니 바위틈에서 쌀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을 주민들은 바위틈을 쑤셔댔고, 이후로 쌀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바위라 불렀다.'

영남알프스 최고봉인 가지산 정상을오르는 등산인 너머로 첩첩 산들이 청명한하늘 아래 너울진다. 마치 하늘길을 오르는듯하다.

지명 유래담인 쌀바위 설화를 흔히 '미혈설화米穴說話'라 부르는데, 전국에서 널리 전승되는 대표적인 설화다. 대부분 과욕을 징계하는 우리 민족의 소박하고 엄격한 윤리관이 반영돼 있다.

"우리 민초들이 힘든 역사를 살아왔으니 쌀만큼 상징적인 게 없었겠죠.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설화이긴 한데 흉년에 굶주린 마을 사람들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돼요."

쌀바위를 우회해 바위 하단부에 내려서니 동굴처럼 아늑한 공간의 바위틈에서는 마치 설화가 사실인양 약수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쌀보다 더 귀한 보약 같은 석간수네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아요."

쌀바위 앞에는 촘촘하게 쌓아올린 돌 벽체에 태양광이 지붕에 설치된 운치 있는 대피소가 자리하고 있다. 벽에 내걸린 메뉴판이 발길을 잡아챘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입맛만 다셨다. 운문령까지는 일사천리로 내려섰다. 한겨울에도 사륜구동 차량이 대피소를 오갈 수 있는 널찍한 임도가 능선을 넘나들며 시원스럽게 나 있다. 눈 쌓인 임도를 미끄럼 타면서 신나게 내려서다 보니 운문령이다. 하지만 이내 난관에 봉착했다. 운문령은 청도군과 울주군을 넘나드는 도로인데 인근에 터널이 생기면서 차 한 대가 안 다녔다. 택시를 호출해도 응답이 없었다. 고개를 넘나드는 칼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날씨가 점차 어둑해질 무렵 산중에서 인사를 나눴던 중년 부부가 운문령에 내려섰다. 구세주였다.

"산 아래 석남사까지만 부탁드립니다."

"석남사에 가도 택시가 없을 텐데 석남터널까지 태워드릴게요."

산행길잡이

가지산(1,241m)은 낙동정맥 350여 km의 산줄기에서 백병산(1,259m)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낙동정맥이 영남에 이르러 1,000m가 넘는 산군을 빚는데, 이곳을 영남알프스라 부른다.

낙동정맥은 고헌산을 시작으로 가지산~능동산~간월산~신불산~영취산~정족산~천성산~원효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에 이른다. 가지산은 영남알프스의 최고봉으로서 평원을 이룬 주변의 산들과 달리 그 위세가 실로 기세등등하다. 암릉과 암봉이 정상부를 향해 치솟아 있으며, 사방으로 깊디깊은 계곡을 품고 있다.

가지산 산행 들머리는 크게 세 군데다. 석남사 원점회귀 코스, 석남터널, 운문령이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코스가 최단코스인 석남터널 들머리다. 대부분은 이곳에서 정상만 올라선 후 원점회귀한다.

차편이 허락한다면 석남터널에서 운문령까지 낙동정맥 마루금을 종주하면 가지산의 진면목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대중교통이나 택시 이용이 불편해 두 대의 차를 양 방향에 둬야 편하다.

하계산행처럼 시간이 넉넉할 때는 석남사 앞 주차장 건너편의 공비토벌작전기념비에서 석남고개를 올라 가지산과 상운산을 거쳐 운문재 직전에서 능선을 타고 석남사로 하산하는 코스를 추천한다. 제법 긴 코스지만 원점회귀 산행이 가능해 편리하다.

동계산행 시 눈 쌓인 가지산은 설악산의 거친 암릉길을 방불케 한다. 능선에 난 등산로 대부분이 빙판길이고 칼바람이 불어 닥친다. 방풍옷과 아이젠을 꼭 챙기도록 한다. 특히 중봉과 가지산 정상, 쌀바위 구간 암릉이 위험하다.

쌀바위(대피소)에서 운문령까지는 임도가 능선을 넘나들며 나 있어 산행이 수월하다. 동계 산행 시는 석남사 계곡으로 하산하는 샛길은 이용하지 않도록 한다. 계곡이 워낙 깊고 가팔라 위험하다.

교통·맛집(지역 번호 052)

서울-중부내륙고속도로-당진영덕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 24번국도를 타고 석남사를 거쳐 석남터널로 오른다. 석남터널 입구에 휴게소와 주차장이 있다.

가지산 석남사 입구 덕현리 주변에 더한마음(052-264-2546, 능이들깨칼국수), 할매추어탕(052-264-1289), 가지산휴게소(0507-1374-2649, 산채비빔밥), 암소마당(0507-1322-6925, 불고기정식), 푸른가든(054-751-7051, 한우육회비빔밥) 등의 식당이 있고, 석남터널 앞에 10여 개의 식당이 있다.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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