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움' 속에서 보낸 지옥 같은 삶…신간 '밑바닥에서'

송광호 2023. 2. 7.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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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김수련이 들여다본 국내 의료계의 현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밑바닥'은 막심 고리키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고리키는 살아갈 의욕조차 잃어가는 밑바닥 인생들의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구로사와 감독은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 광기에 물드는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를 괴기스럽게 그렸다. 영화에서 두 인물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한 명이 "넌 분명 지옥에 떨어질 거야"라고 말하자, 그와 대화하던 다른 인물이 "여기가 지옥인데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거야"라고 맞받아친다.

영화 포스터

간호사 김수련도 그렇게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아침 세시에 기상. 병원에 도착하면 네 시였다. 전임 간호사에게 인계를 받고, 정맥 주사, 테이프 등의 개수를 세며 이상 유무를 파악했다. 그 과정에서 1천700원짜리 가위라도 분실하면 쓰레기통을 뒤졌다. 쓰레기봉투를 헤집으면 그 안에 대변 묻은 기저귀, 가래 묻은 휴지 등이 나왔다. 어쨌든 가위를 찾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일은 계속 이어졌다. 환자 상태 확인, 투약, 보호자들의 전화, 컴퓨터단층촬영(CT) 일정 확인 등…. 그 과정에서 알람에 답하지 않으면 선배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의사들은 제대로 지시하지 않고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미뤘다

그는 태울 때까지 괴롭힌다는 이른바 '태움'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특히 중환자실에서의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너 컬처(세균배양검사)도 못 해?" "너 거기 서서 거치적거릴 거면 나가" "너 선배에게 다 시켜놓고 지금 기록해?" "내가 할 거니까 너 다른 일 해" "네 환자잖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이 선배, 저 선배에게 돌아가면서 이른바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는 신촌 거리를 매일 울면서 퇴근했고, 어떻게 죽을지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노인처럼" 늙어갔다.

'태움 간호사 사망' 업무상 재해 인정 촉구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수련은 7년간 그런 세월을 버텼다. 이명과 우울증, 십이지장궤양, 불면증이 부산물로 따라왔다. 하지만 새내기 간호사는 책임 간호사로 성장했다. 코로나19 때는 대구로 파견 나가기도 했다. 지금은 국경없는의사회 소속으로 미국에 파견돼 '미국 적십자 재난 의료팀'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새내기에서 경력 있는 간호사로 성장한 것이다. 김수련이 쓴 '밑바닥에서'(글항아리)는 랭보의 시집 제목처럼 '지옥에서 보낸 한철' 같은 삶을 경험한 그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단순히 '태움'과 한 인간의 성장 이야기만 담긴 건 아니다. 이 책의 미덕은 뒷부분, 그러니까 간호사의 인력 구조, 교육 문제 등 의료계 구조 문제에 더욱 집중한다는 데 있다. 저자는 '태움'도 인력 부족이라는 구조적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설사 인력이 채워진다 해도, 불합리한 처우와 시스템 탓에 금방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덧붙인다. 요컨대 저자가 말하는 건, 간호사가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구조다.

"문제의 초점은 제대로 된 교육제도와 기간 없이 도제식 교육에 일임하는 행태, 도무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관대함과 자비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업무량에 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말할 수 없도록 압박하는 서열문화에 있다…. 일이 무겁고 무거운 부서일수록, 폐쇄적인 부서일수록 괴롭힘은 더욱 악랄해진다."

실제 국내 간호사들의 업무량은 과다하다. 책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은 1인당 6~8명이다. 2016년 통계상 미국은 간호사 한 명이 5.3명을, 한국의 종합병원은 16.3명을, 일반 병원은 43.6명을 본다. 간호사 한 명이 담당하는 환자가 한 명 증가할 때마다 환자 사망률이 7% 증가한다는 통계도 있다. 부족한 간호 인력과 의료 인프라 탓에 일부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기도삽관으로 끝냈을 것을 심폐소생술을 해 사망하거나 심각한 후유증을 얻기도 한다. 의료가 간호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이유다.

코로나 때 파견 간 김수련 간호사(맨 앞) [연합뉴스 자료사진]

저자는 말한다. 의료는 "시스템"이라고. 어떤 스타플레이어, 가령 드라마에 나오는 천재 의사 한 명이 있다고 해서 환자가 살아나는 게 아니라고. "결국 환자를 24시간 옆에서 돌보는 이는 간호사이고, 환자를 지켜주는 것은 간호사의 대처 능력, 모니터링 능력, 통합적 역량과 업무 연속성"이라고.

256쪽.

책 표지 이미지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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