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설과 예술 사이…현대 회화 길을 연 '마네의 도발' [송주영의 맛있게 그림보기]

2023. 2. 7.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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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현대 회화의 시작, 폴리-베르제르의 미스터리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 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에두아르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바', 1882년, 런던 코톨트 갤러리 소장

폴리-베르제르에서 찍은 사진 같은 그림

지금 당신은 타임머신을 타고 1882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고, 파리9구역에 있는 예술가들의 아지트, 폴리-베르제르의 문을 연다. 자욱한 담배 연기 가득한 홀 안에는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취기 어린 목소리로 예술과 낭만, 사랑에 대해 열변 중이다. 왼편 천장에는 초록 구두를 신은 무용수가 그네 곡예를 하고 있다. 여종업원이 있는 바(bar)에 다가간다. 성모 마리아처럼 두 팔을 벌린 채 카운터 끝을 짚고 서 있는 검은 옷의 여종업원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다른 곳을 보고 있나? 웃음기가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던 당신은 21세기에서 가져온 카메라를 들어 찰각 셔터를 누른다.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2023년 현재로 되돌아온 당신의 카메라에 담겨 있는 장면이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폴리-베르제르의 바'와 똑같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어디가 이상한지 발견했는가?


마네는 그림 ‘내용’에 혁명을 가져온 현대회화의 창시자

이 그림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에두아르 마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현대적 회화’의 물꼬를 튼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흔히 세 명의 화가들이 거론된다.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다. 세잔은 2차 평면 회화에서 사물을 구, 직육면체, 원뿔 등으로 단순화해서 보는 실험으로 추상미술의 개념적 선구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을 이어 시간과 공간을 분할한 것이 피카소였다. 세잔과 피카소는 회화의 ‘형식’에 대해 실험했다면, 마네는 회화의 ‘내용’에 대한 혁명을 시작한 인물이다. 마네는 현대 회화의 창시자, 또는 모던 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러한 마네를 설명하는 세 작품이 있는데 '풀밭 위의 식사', '올랭피아' 그리고 마네의 유작으로 알려진 '폴리-베르제르의 바'다.

에두아르 마네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아버지와 어머니 초상화, 1860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마네가 서양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하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인상주의 화풍의 흐드러진 붓 터치도 아니요, 일본 목판화 느낌의 기법만도 아니다. 일상의 장면을 화폭에 담는 일도 새롭지는 않다. 마네가 특별한 이유는 고전 미학에 대한 지속적인 도발 때문이다. 19세 말 프랑스 파리는 마네가 일으킨 스캔들로 수군거렸다. 그는 명실공히 파리의 ‘이슈 메이커’였다. 그러나 그는 점잖은 수트 차림으로 거리를 걸었던 금수저 집안의 신사였다. 그의 친가는 대대로 법관이었고, 그의 외가는 대대로 외교관이었다. 마네는 부유한 집안 자제들의 학교에 다녔지만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강요로 사관학교 입학 시험을 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마네는 18세부터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했다.


외설과 예술 사이를 가로지르는 실험

화가로서 마네를 스타덤에 올려 준 작품이 '풀밭 위의 점심 식사'다. 2년 후 그는 또 사고를 친다. 매춘부를 고대 여신의 모습에 빗대어 그린 '올랭피아'로 그는 또 한 번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많은 파리의 지식인들이 분노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의 여성 누드는 외설이었다. 마치 내가 존경하고 지지하는 유명 정치인의 누드처럼 무례하고 불편했다. 요즘으로 치면, 유명 여배우의 얼굴에 요염한 포즈의 여성 누드를 합성한 '딥페이크'에 분노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19세기 말까지 여성 누드는 신화 속 여신들 또는 성경 속 인물이어야 했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 속 누드 여성이 이웃 여성이라 해도 불편했을 시절에, 심지어 매춘부 여성을 그렸으니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중에 모두에게 존경받던 소설가 에밀 졸라가 '올랭피아'에 대해 극찬하며 옹호에 나서면서 마네는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마네의 '풀밭 위에 점심 식사', 1863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마네의 '올랭피아', 1863년에 완성되었으나 1865년에 전시되었다. 오르세 미술관 소장

달리 생각해보면, 마네가 당시로서는 외설에 가까운 그림을 전시장에 선보이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재력과 학식을 가졌던 가문의 일원이었던 점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에는 자본과 대중이 섞이며 서서히 현대적 개념의 예술 시장이 형성되고 있었다. 마네는 그 시절 파리 문화계의 유명 인사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시인, 소설가, 화가, 고위급 정치인을 아우르는 마네의 인적 네트워크는 그의 파격적인 예술 실험을 보호하고 빛내 주었다. 이러한 그의 인간관계는 그의 복잡한 사생활과 관련한 스캔들에도 보호막이 되었다.


마네의 연인들과 세기말의 파리 풍경

마네는 평생 한 명의 아내를 두었으나 최소 3명 이상의 내연녀가 있었다. 마네의 입주 가정교사 수잔 렌호프는 그의 아버지와 마네 형제 모두의 연인이었다. 수잔은 1852년 아들 레옹을 낳았는데 그녀 자신도 누구의 아이인지 몰랐다는 기록이 있다.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 마네는 그녀와 결혼했는데, 집안의 명예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설과 마네가 진심으로 렌호프를 사랑했다는 추측도 있다. 여기까지만 하면 나름 의리의 사나이라 하겠으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네를 스타로 만들어준 '풀밭 위의 식사', '올랭피아'의 실제 모델이었던 여성 화가 빅토린 뫼랑은 오랫동안 마네의 연인이었다. 이후 인상주의 화풍의 한 획을 그은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가 그의 삶에 들어왔다. 마네는 모리조와 계속 함께하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남동생과 결혼시켰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마네와 모리조의 이야기는 영화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네의 마지막 연인은 당시 여러 파리 예술가들의 뮤즈로 유명했던 여배우 메리 로랑이었다. 메리 로랑은 마네의 유작 '폴리-베르제르의 바' 그림 속 흰 옷을 입은 손님으로 등장한다.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아내 수잔 렌호프의 초상화
마네의 첫 번째 연인이었던 화가 빅토린 뫼랑
마네의 두 번째 연인이었던 베르트 모리조
마네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여배우 메리 로랑

지금의 잣대로 마네의 여성편력을 가늠하기보다는 마네를 포함하여 당시 파리 남성 예술가들 사이에서 트렌드처럼 거론되었던 ‘결혼 무용론’을 짚어보는 것이 의미 있겠다. 마네와 가깝게 지냈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 발레리나의 화가 드가, '악의 꽃'을 쓴 보들레르 등 상당수의 ‘핫하고 힙한’ 파리의 남성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결혼 제도에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여성 혐오 감정을 가졌다기보다는 구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발달로 경제구조가 복잡해지고, 소비시장이 형성되던 시절이었다.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전통 방식의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이 회의적으로 변하던 시기였다. 음악과 미술, 공연 세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던 때였다. 세기말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창작 열기가 오히려 새로움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 시절 그대로를 담은 것이 바로 '폴리-베르제르의 바' 작품이다.


폴리-베르제르의 미스터리

다시 '폴리-베르제르의 바'를 자세히 살펴보자. 이 그림은 미술사에서 최초로 특정 브랜드가 등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슴에 꽃 장식을 한 검은 드레스 여종업원의 양 옆으로 늘어선 술병 중에 붉은 삼각형 로고가 새겨진 맥주가 있다. 이 술은 1876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상표를 등록한 바스(Bass) 에일이다. 특정 브랜드 상품을 그림에 넣는 일은 20세기 팝아트에서 흔했지만 1882년을 살던 사람들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학자들은 이것이 소비 사회에 대한 마네의 통렬한 고발이라고 보았다. 여종업원이 매춘부로서 당시 남성들에게 바스 맥주처럼 소비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거울에 비친 남성이 여종업원에게 성적 요구를 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미스터리가 시작된다.

가장 큰 수수께끼는 모자 쓴 사내의 실제 위치다. 거울에 비친 남성은 여종업원과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인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남자는 여종업원 바로 앞에 있어야 하는데, 없다. 화가는 의도적으로 남성을 그리지 않았던 것일까? 이 사내는 지금 술을 사는 중인가, 여자를 사는 중인가? 술병 로고와 닮은 여자 가슴의 꽃, 금박이 있는 검은 샴페인병은 검은 드레스의 금발머리 여종업원을 의미하는가? 거울에 비친 술병들의 위치도 이상하다. 100년이 넘도록 이 그림은 논란 속에 있었다. 사람들은 “마네는 보이는 대로 그린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원하는 것을 변형해서 그렸네! 이 그림은 논리적으로 틀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현대적이다!”라고 하거나, “아니야, 이건 그냥 마네의 실수야. 죽기 1년 전이라 많이 아팠어.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서 틀릴 수도 있겠지”라고 했다.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좌측 상단에 있는 그네 타는 곡예사의 초록 구두
바스 브루어리의 로고
여종업원 가슴에 달린 꽃의 모양('폴리-베르제르의 바' 부분 확대)
'폴리-베르제르의 바' 속 술병들. 좌측 붉은 술병 라벨에 에두아르 마네의 서명과 제작연도가 기록되어 있다.

마네는 현대적 편집기술을 회화에 도입한 연출가

이 그림의 미스터리는 2001년 호주의 미술사 박사 논문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미술사학자 말콤 파크는 무려 400페이지가 넘는 논문에서 최신 컴퓨터 기술과 사진술을 활용하여 폴리-베르제르의 이 순간을 시노그래피(원근도법)로 재현하였다. 심지어 폴리-베르제르의 당시 도면까지 확보하여 마네가 어느 지점의 테이블에 앉아서 이 순간을 포착했는지도 찾아낸다. 놀랍게도 마네는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10시 방향으로 그녀를 보고 그렸으며, 모자 쓴 사내는 그녀의 앞이 아니라 왼쪽으로 서서 여종업원과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주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멀리 테이블 위치에서 10시 방향의 시선에 들어오는 거울로는 마치 남자가 여자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자체가 ‘착시’다. 오히려 남자의 시선은 거울 속에 있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에게 있다. 이 여성은 당시 마네의 연인이었던 메리 로랑이다.

마네가 틀리게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이는 대로 그렸다. 다만 화면 크기를 ‘의도적으로’ 편집했을 뿐이다. 술병 로고와 샴페인 색상을 닮은 여성의 피곤한 모습에서 소란스럽던 소비사회의 시작을 느낄 수도 있고, 거울에만 비친 남성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의 은밀함을 상상할 수도 있다. 이 여성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과 관람자가 같은 위치에 서 있다는 착시를 주고 싶은 마네의 농익은 농담일 수도 있고, 자신의 연인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남성에 대한 위트일 수도 있다. 여러 의도 중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마네는 끝까지 이슈 만드는 일에 진심이었다는 것, 무려 100년이 넘도록 사람들을 수군거리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마네가 21세기를 살았다면 영화 감독이겠다. 현실 비판을 담은 시나리오를 쓰고 아름다운 여배우들을 캐스팅하고 뛰어난 편집기술과 연출력을 가진 예술가다. 과연 현대 예술의 길을 터준 인물이라 할 만하다.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시노그래피(Photograph by Greg Callan 2000, Courtesy of Malcolm Park)
컴퓨터로 생성한 의 시노그래피 조감도(Assistance of Darren McKimm, Courtesy of Malcolm Park) 자료 말콤 파크의 '마네 회화의 공간적 착시와 모호성', 2001, 253p. http://hdl.handle.net/1959.4/54758에서 2023년 1월 19일 다운로드

송주영 미술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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