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트럼프와 뭐가 다른가”

임민혁 기자 2023. 2. 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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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반도체·전기차 정책 ‘中 시장 포기’ ‘美 우선’ 강요
우방국 협조 못 받아 실패한 ‘위성 수출 금지’ 사례 돌아봐야

얼마 전 미 외교협회(CFR)가 ‘대(對)중국 반도체 봉쇄’ 성공을 위해서는 1990년대 말 ‘인공위성 수출 금지’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미 정부에 조언했다. 핵심은 한마디로 “동맹·우방의 협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수출 규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하려면 미국이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바이든 행정부는 거꾸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으로 우방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게 CFR의 우려다. IRA 피해 당사자인 우리도 대미 협상을 위해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2022년 10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시러큐스의 오논다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열린 반도체산업육성법(CHIPS) 제조 행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2022.10.28 /로이터 연합뉴스

90년대 말 중국이 개발해 쏘아 올린 인공위성에 미국 회사가 첨단 유도 시스템 기술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전용(轉用)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미국은 즉각 조치에 나섰다. 위성 수출 담당 부처를 기업 논리를 대변하는 상무부에서 국가 안보를 최우선하는 국무부로 바꿨다. 미 의회는 모든 우주산업 관련 부품과 기술을 엄격히 통제받는 군용 물자 리스트(USML)로 이전시키고, 예외를 적용받으려면 의회 승인 절차를 거치도록 했다. 사실상 위성 수출을 전면 금지한 것이다. 중국의 무기 개발에 필요한 첨단 기술을 차단하려고 반도체를 ‘국가 안보 이슈’로 끌어올린 현 상황과 판박이다.

미국이 의도한 대로 한동안 중국 우주 프로그램은 주춤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은 자체 기술 개발에 나서는 동시에 미국 봉쇄 조치에 동참하지 않는 유럽에서 대안을 찾았다. 유럽 업체들이 중국과 수억 달러 규모 위성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오히려 중국 시장을 잃은 미국 위성 산업이 휘청였다. 90년대 말 전 세계 위성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73%였는데, 중국 수출 금지 조치 후 6년여 만에 25%로 떨어졌다. ‘나 홀로 제재’는 자기 발등을 찍고 중국의 자립도를 높여준 결과를 초래했다. 지금 미군에서는 “10년 안에 우주 분야에서 중국에 추월당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지경이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는 인공위성 때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공세적이다. 중국이 반도체를 사 오기도, 자체 생산하기도 어렵게 하려고 미국 기술·장비를 쓸 경우 미국이 아닌 제3국 기업의 중국 수출까지 제한한다.

하지만 전 세계 패권 경쟁 차원의 그림을 그리는 미국과 한국·일본·네덜란드·독일·대만의 계산이 같을 순 없다. 중국은 ‘미국의 적(敵)’ 이전에 최대 시장이다. 세계 2·3위 반도체 장비 생산 업체인 네덜란드의 ASML, 일본의 도쿄일렉트론이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인 것도 이 때문이다. 당장은 ‘민주주의 수호’ 기치 아래 미국에 협조하지만 장기화되면 어떻게 입장이 바뀔지 모른다. “중국 군사기술과 무관한 민간 회사와만 거래하겠다” “강도 높은 봉쇄가 되레 군사적 긴장을 높인다” “중국 시장을 버리고는 기술 초격차 유지를 위한 비용을 충당할 수 없다”. 이탈할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다.

미 조야에서도 우방국들이 희생을 감수하는 만큼 이들에게 미국 시장을 더 열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국과 일본 EU 전기차에 보조금을 안 주는 식의 보호무역 강화로는 반도체 봉쇄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 시장 포기’와 ‘아메리카 퍼스트’를 동시에 강요한다면 “트럼프와 뭐가 다르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프랑스 경제장관은 대놓고 “미국이 중국 스타일 정책을 편다”고 했다.

친한 사이일수록 주고받기가 깔끔해야 한다. 70년을 맞은 한미 동맹은 이 정도 이견으로 삐걱댈 만큼 허약하지 않다. 우리 논리를 잘 가다듬어 4월 한미 정상회담 등을 통해 돌파구가 열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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