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해권 쥔 로마… 명장 한니발도 해상보급 끊기자 무릎 꿇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3. 2. 7. 03:03 수정 2023. 2. 7.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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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4]로마, 지중해를 장악하다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에 맞서는 로마군 -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자마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맞서 싸우는 전투 장면을 묘사한 16세기 그림. 이탈리아 화가 줄리오 로마노와 네덜란드 화가 코넬리스 코르트가 그린 그림으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로마군은 제해권 장악에 힘입어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2차 포에니 전쟁의 승기를 잡았고, 결국 카르타고를 완전히 궤멸시키며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게 됐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고대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면서 제국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첫 단계가 서부 지중해의 강국 카르타고와 포에니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둔 일이다. 1차 포에니전쟁 이후 로마와 카르타고는 교역 관계로 되돌아갔다. 그렇지만 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할 수는 없는 법,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두 강대국이 언제까지 모호한 평화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기원전 219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에스파냐 내 로마의 주요 동맹인 사군툼을 정복하면서 2차 포에니전쟁이 발발했다. 한니발이 이끄는 원정군은 육로로 남프랑스를 거쳐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가 기원전 218년부터 로마군을 공격하였다. 한니발은 기습과 기만전술에 능한 명장이었다. 초기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면 대결을 감행한 로마군은 여러 차례 패배했고, 극심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궁지에 몰린 로마군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전략을 구사했다. 파비우스(Quintus Fabius)는 원정군 한니발의 약점이 보급이고 또 시간에 쪼들린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주로 적의 보급선을 공격하거나 유리할 때에만 소규모 전투를 벌일 뿐, 위험을 무릅쓰는 대규모 전투는 회피했다.

이와 같은 지연작전이 한니발을 지치게 만들었고, 로마는 기사회생했다. 파비우스는 ‘비겁함으로 나라를 구한 장군’이 되었다. 그렇지만 자존심에 목맨 지도자가 다시 일을 그르쳤다. 기원전 216년 통령에 선출된 테렌티우스 바로(Terentius Varro)가 나폴리 인근의 칸나에(Cannae)전투에서 전군을 중앙에 집중시켜 적군을 공격하는 무모한 작전을 폈다가 노련한 한니발의 포위 전략에 말려들었고, 로마군 약 5만명이 몰살당했다. 그렇지만 대승을 거둔 한니발 역시 곧 몰락하고 만다. 본국 정부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원정군이 언제까지 계속 버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203년 그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군사력을 재건한 로마군은 스키피오의 지휘하에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했고 인근의 자마(Zama)에서 치른 결전에서 승리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2차 포에니전쟁에서 눈여겨볼 요소는 제해권이다. 표면적으로는 바다가 아무런 역할을 안 한 것 같지만 사실 이면에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요소는 제해권이다. 한니발은 로마를 공격하려고 육로로 먼 거리를 행군했는데, 마살리아(Massalia·고대 그리스인들이 오늘날 마르세유에 세운 식민 도시)가 로마 편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니발이 알프스산맥을 넘어간 것 또한 천재적인 기습 작전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처럼 힘들게 진군해야 했던 이유는 로마가 이미 해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로 군을 이송할 수 없어서 육상의 험로를 지나야 했기에 출정할 때 6만명이던 전사 중 3만3000명이나 잃었다. 칸나에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도 끝내 로마를 정복하지 못한 이유 또한 해상 보급이 막혀서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해군이 직접 승리를 거두지는 않지만 승리를 거두도록 만들어준다는 말이 이런 의미다.

서지중해의 최강 국가 카르타고를 두 번이나 격파한 후 로마는 여세를 몰아 동지중해 지역의 경쟁자들을 격파해 갔다. 마케도니아를 제압하고 셀레우시드 왕조 또한 몰락시켰으며, 이집트를 곡물과 물자를 보급하는 일종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제 지중해 세계는 거의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로마는 승리를 확고히 굳히기 위해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여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2차 포에니전쟁에서 패배하고 로마에 거액의 배상금을 무는 처지에 몰린 카르타고는 사실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아 보였다. 그런데 대(大)카토(기원전 234~기원전 149)가 직접 그곳을 찾아가 보니 인구와 물자가 풍부하여 조만간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로마에 도전할 위험이 커 보였다. 귀국한 카토는 원로원에서 카르타고를 다시 공격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 카르타고에서 가져온 무화과를 하나 보여주자 여러 의원이 아름답다고 찬탄했다. 카토는 “이 과일이 나는 땅이 로마에서 겨우 사흘밖에 안 되는 곳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카토는 매번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Ceterum censeo, Carthago delenda est)”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결국 그가 원로원을 움직였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 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마 장군 스키피오. /나폴리 국립 인류학박물관

로마는 다시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이려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 카르타고 측에 스스로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주민들 모두 80 스타디온(15~20㎞) 내륙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했다. 카르타고가 이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거부하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두 번 연속 전쟁에 졌다고 해도 카르타고는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쉽게 이길 수는 없었다. 3년의 공격 끝에 기원전 146년 마침내 승리를 거둔 로마는 카르타고 시내에 조직적으로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었고, 살아남은 주민 5만명을 모두 노예로 삼았다. 7세기 이상 번영했던 강력한 해상 세력이 이렇게 종언을 고했다. 이제 지중해 전역에서 로마를 위협할만한 세력은 사라졌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이 되었다.

로마 제국의 판도를 생각해 보자. 학생들에게 지도상에서 로마 제국 영토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짚어보라고 하면 대개 유럽 대륙을 가리키곤 한다. 사실 로마 제국 영토는 ‘유럽 대륙’이 아니라 ‘남부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로마 제국은 한복판에 바다를 품고 있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 내의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했지만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후 해상으로 나가서 서부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고 이어서 동부 지중해 세계까지 정복했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 전체를 오이쿠메네(oicumene·하나의 세계)로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 큰 틀이 제국이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통합된 통치 질서를 조직하고, 강한 군사력으로 평화를 강제했다. 이 체제는 대체로 서기 3세기 중엽까지 작동했고, 이후 서서히 약화해 갔다.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성장하여 북아프리카가 이슬람권이 되었을 때 지중해는 한 문명의 ‘중심’에서 두 문명의 ‘경계’가 되었다. 상호 교역과 문화적 소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북부의 기독교권 유럽과 남부의 이슬람권 아프리카가 대치했다. 지중해 세계 전체가 하나의 안정된 질서하에 있었던 때는 로마 제국 시기가 유일하다.

돌이켜 보건대 바다로 나간 로마는 바다를 통해 팽창해 나갔다. 바다는 인력과 물자가 이동하는 중요한 통로로서 로마 제국의 생명선이었다. 이 바다를 로마인들은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라 불렀다. 로마는 육상 제국이면서 동시에 해양 제국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여기에서 동시대 중국의 한(漢) 제국과 기본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역사가들은 로마 제국과 한 제국은 영토 크기나 정치 체제, 이민족과의 관계(각각 게르만족과 흉노족과 대치하는 상태) 등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평가한다. 그렇지만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중국의 한 제국이 본질적으로 대륙 제국이고 해양 세계와는 간접적으로 연결되었을 뿐이지만, 로마 제국은 대륙 제국과 해양 제국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역사 시기 내내 대륙 전체가 제국 질서하에 조직되지만, 유럽에서는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대륙성’이 강한 독일이나 러시아 같은 국가들과 ‘해양성’이 강한 영국이나 네덜란드 같은 국가들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는 흐름을 보인다. 유라시아 대륙 양쪽 끝에 자리 잡은 거대한 두 문명은 이렇게 상이한 길을 갔다.

폼페이우스, 해적을 퇴치하다

로마가 지중해를 제패한 후에도 여전히 남은 중대한 문제는 사방에 출몰하는 해적이었다. 젊은 시절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해적에게 나포된 적이 있다. 다른 승객들이 겁에 질려 떨고 있을 때 22세의 카이사르는 태연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해적은 신속금(身贖金)으로 20달란트라는 거액을 요구했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이 워낙 중요한 인물이므로 50달란트(금화 1만2000개)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대신 자신이 풀려나면 돌아와서 그들 모두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겠다는 말도 했다. 해적은 젊은이가 농담하는 것으로 알았겠지만, 카이사르는 풀려나자마자 실제로 병사들을 동원하여 해적을 모두 잡아서 처형했다.

해적을 완전히 퇴치한 인물은 폼페이우스다. 기원전 67년, 원로원은 심각한 해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폼페이우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는 선박 500척, 병사 12만, 기병 5000명을 동원하여 지중해 전역을 13개 해역으로 나눈 후 한 곳씩 차례로 근절해 나갔고, 결국 지중해의 모든 해적을 소탕했다. 지중해는 말 그대로 로마인들에게 ‘우리의 바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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