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실패가 만든 이스라엘 무인기

노석조 기자 2023. 2. 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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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이스라엘 무인기(드론) 부대를 취재하러 갔다. 이스라엘 공군기지 격납고에 들어서니 16 길이 날개를 펼친 정찰 무인기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스라엘 공군 중령이 말했다. “이거면 평양에서 김정은이 뭘 하는지도 정찰할 수 있을 겁니다.” 이 기지에는 세계 각국에서 선발된 엘리트 장교들이 이스라엘의 무인기 운용력 등을 배우기 위해 파견 근무 중이었다. 인구 900만명인 이스라엘은 내수 시장이 작아 제조업이 약하다. 차는 물론 웬만한 장비는 직접 만들지 않고 수입한다. 그런 나라가 무인기 강국 반열에 올랐다니 놀라웠다.

이스라엘 유비전사의 히어로30 자폭형 무인기./이스라엘 유비전사

이스라엘이 무인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개발에 사활을 건 건 전쟁에서 뼈아픈 실패를 겪으면서다.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하며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빼앗았다. 그런데 시나이 반도는 이스라엘 본토보다도 3배 가까이 컸다. 언제 또다시 이집트가 쳐들어올지 시나이 반도에서 대비하기 어려웠다. 일반 항공기를 띄워 이집트 상공에 넘어가 정찰을 하자니 최신 소련제 방공 무기에 격추될 우려가 컸다. 한 장교가 TV에서 ‘바르 미츠바(유대인 성인식)’ 선물로 원격 조종 비행기를 주는 모습을 본 것에 착안해 정찰 무인기 개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개발팀은 군에서 엉뚱한 짓이라는 비아냥을 받다 얼마 가지 못하고 1969년 해체됐다.

군은 4년 뒤인 1973년 10월 이집트의 기습적인 전쟁 개시 공격에 치명타를 입었다. 정찰 실패였다. 가까스로 전세를 뒤집어 판정승을 거뒀지만 진 것과 다름없었다. 사망 병력이 2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피해가 컸다. 1~3차 전쟁을 통틀어 가장 큰 사상자였다. 군에서는 “무인기 프로젝트가 폐기되지 않았으면 무인 정찰기로 이집트 전쟁 준비 상황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이 나왔다. 군은 무인기 개발팀을 급히 부활시켰다. 6년 뒤인 1979년 첫 무인기인 ‘스카우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한국 무인기 ‘송골매’가 2000년 나온 것보다 20여 년 앞선다. 실패를 분발의 계기로 만든 이스라엘은 현재 ‘자폭 드론’ ‘공격형 드론’ ‘안티 드론’ 등 각종 무인기 무기를 종합 세트로 갖춘 강군이 됐다.

얼마 전 북한 무인기 침투 사태로 우리 군의 대비태세 허점이 드러났다. 2~3m 소형 무인기를 효과적으로 무력화하는 법을 몰라 허둥댔고, 용산 비행금지구역(P-73) 침투를 허용했다. 군 수뇌부가 북 무인기 P-73 침투 사실을 사후 검열로 알게 되고도 국민에 제때 알리지 않고 하루·이틀 묵히다 ‘용산구(區)까진 못 들어왔다’ ‘P-73에 살짝 스쳤을 뿐이다’는 식으로 설명하며 실책을 모면하려는, 군인답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실패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실패에서 무얼 얻느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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