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마가 영웅으로…여성혐오 사회의 민낯

나원정 2023. 2. 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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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성스러운 거미’(8일 개봉)는 이란에서 성매매 여성 16명을 살해하고 종교적 이유로 자신을 정당화한 연쇄 살인마 사이드 하네이 실화가 토대다. 허구의 여성 기자 ‘라히미’(사진)가 사건을 파헤치며 극을 이끈다. [사진 판씨네마]

2000년부터 1년간 이란 마슈하드에서 성매매 여성 16명이 잇따라 살해된다. 어린 자녀를 둔 싱글맘, 생계가 막막해진 임산부도 있었다. 뒤늦게 붙잡힌 범인 사이드 하네이는 이란·이라크전 참전용사이자 세 아이를 둔 노동자 가장이다. 이슬람 광신도인 그는 “거리를 정화하는 것은 신의 일”이라며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한다. 보수세력 일각에선 그를 영웅시하는 지지자도 생겨난다.

이런 실화를 재구성한 영화 ‘성스러운 거미’(감독 알리 아바시)가 8일 개봉한다.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 역의 배우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41)는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에브라히미, 히잡 벗고 주연 맡아

영화의 제목은 실제 범인이 시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도르(얼굴만 빼고 온몸을 가리는 천)로 칭칭 감아 유기하며 얻은 ‘거미 살인마’란 별명에서 따왔다. 이란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종교적으로 옭아매며 살인마를 낳은 사회 그 자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알리 아바시(41) 감독은 사건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며 15년 전부터 영화를 구상해왔다고 한다. 지난해 칸 현지 인터뷰에서 그는 “이란에는 오랜 여성 혐오 습관이 있는데, 사이드 하네이의 범죄에서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면서 “연쇄살인마를 잉태하는 사회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영화 ‘성스러운 거미’(8일 개봉)는 이란에서 성매매 여성 16명을 살해하고 종교적 이유로 자신을 정당화한 연쇄 살인마 사이드 하네이 실화가 토대다. [사진 판씨네마]

주인공인 기자 라히미는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은 정부와 경찰 대신 스스로 미끼가 되어 살인범을 좇는다. 전 직장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원했던 편집장을 끝까지 거부하다 해고당한 라히미는 자신을 둘러싼 부당한 소문에 맞서왔다. 영화는 연쇄살인범이 뻔뻔하게 활보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여성들은 히잡 안에 숨어 살아야 하는 이란의 현실을 라히미의 시선으로 가감없이 들춰낸다.

영화가 캐나다·유럽 등지에서 개봉한 지난해 9월, 이란에선 22세 쿠르드계 여성이 히잡을 느슨하게 착용했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구금됐다가 사망했다. 이 사건은 반정부 ‘히잡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강경 진압으로 한 달 만에 시위 사망자가 200명을 넘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아카데미상 수상 영화 ‘세일즈맨’의 이란 국민 배우 타라네 알리두스티는 인스타그램에 히잡을 벗은 모습으로 반정부 시위 지지를 밝혔다가 지난해 12월 사회 혼란 조장 혐의로 구금됐다.

촬영 때부터 정부의 감시를 피해 터키·요르단을 전전한 ‘성스러운 거미’의 감독과 배우들도 지난해 칸 영화제 이후 이란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란 정부가 수상 축사 대신 “무슬림의 신념에 대한 모욕”이란 성명을 낸 영향이 크다.

지난해 칸 영화제서 여우주연상

지난해 5월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성스러운 거미’ 주연 배우 메흐디 바제스타니(왼쪽부터)와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 알리 아바시 감독. [AP=연합뉴스]

현지 매체에 따르면 이란 문화부는 이 영화를 “가짜, 증오, 역겨움”이라 비난하며 “제작진이 살만 루슈디가 정한 길을 따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인도계 영국 작가 루슈디는 자신의 소설 『악마의 시』가 이란에서 신성모독으로 낙인 찍히며 암살 위협에 시달려왔다.

테헤란 출신인 아바시 감독은 덴마크에서 영화 공부를 한 뒤 북유럽 영화계에서 활동해왔다. ‘성스러운 거미’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부문에 덴마크 대표작으로 출품된 이유다.

살인마 사이드 역을 맡은 이란 배우 메흐디 바제스타니도 영화 제작진의 보호 하에 독일 베를린에서 배우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배우 에브라히미의 사연은 영화 속 라히미보다 더 극적이다. 테헤란 출생으로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18세에 첫 단편영화를 만든 그는 2006년 드라마 ‘나르게스’로 전성기를 맞았지만, 불법 유출된 섹스 동영상의 주인공으로 지목되며 추락했다. 그는 혼외 성관계 혐의로 징역형과 97대의 태형을 선고받을 상황이었다. 결국 2008년 프랑스 파리로 망명, 캐스팅 디렉터 등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그는 애초에 ‘성스러운 거미’에 캐스팅 디렉터로 참여했지만, 주연 배우가 히잡 없이 촬영해야 한다는 조건에 겁을 먹고 돌연 하차하자 직접 주연을 맡아 스크린에 복귀했다.

‘성스러운 거미’는 공개 초반 서구 평단으로부터 ‘비윤리적 묘사 방식’이란 지적을 받기도 했다. 살인마에게 희생되는 여성들의 신체를 화면에 전시하듯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에 아바시 감독은 이란의 검열 역사에 맞선 표현 방식이라 응수했다. 미국 공영 라디오 NPR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50년 간 이란 영화에서 여성의 몸은 (히잡과 차도르로 가려진 채) 없었다. 이 영화는 폭력이든, 섹스든, 라히미의 페디큐어든 가림막을 걷어젖히고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려 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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