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 몰린 중년 직장인의 비상구 ‘책 모임’에서 찾았어요”
[짬][짬] 독서활동가 김승호씨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 김승호(55·사진)씨는 올들어 회사로부터 “명퇴(명예퇴직)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명퇴가 아니라면 월급이 줄어들고 책임과 권한도 줄어드는 임금피크제를 선택해야 했다. 자존감이 떨어질 수 있는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느니 명퇴를 결정하는 또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부하는 ‘독서공동체’의 힘 덕분에 회사를 계속 다니기로 결정했다.
“2015년부터 책 모임을 시작하면서 직장생활과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고, 임금피크제를 선택할 마음의 여유도 생긴 거죠. 독서공동체가 아니었다면 저도 ‘명퇴하고 사업이든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현재 그는 책 모임 6개에 참여하고 있다. 이 가운데 3개 모임은 직접 운영한다. ‘책방 흥신소’ 팟캐스트 방송을 4년째 진행하고, 퇴근 뒤 책 모임 리더(운영자) 양성 교육도 지도한다. 평범한 직장인이 3, 4일에 한 권씩 매년 100~120권을 읽고 ‘1일 1블로그’를 실천하는 비법이 궁금해 지난 2일 서울시 중구 ‘숭례문학당’에서 그를 만났다.
김승호씨가 처음 참석한 책 모임은 ‘서평독토’라는 서평 쓰기 모임이었다. 독서공동체를 지향하는 숭례문학당에서 2013년부터 시작한 모임이다. 50여 명의 참석자가 각자 써온 서평을 낭독한 뒤 느낌을 나누는 현장에서 그는 이른바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때 서평을 쓴 첫번째 책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왠지 제 이야기인 것 같았습니다. 40대 후반, 회사에 다니지만 성격에도 맞지 않는 일을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삶. 정체되고 한계에 부딪혀 많이 힘들었는데, 그 책의 서평을 쓰면서 상처가 많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자신의 삶을 재정립하고 싶었고 실행에 옮겼다. 숭례문학당에서 개설한 ‘독서활동가 양성과정’을 주말마다 단계별로 밟아나갔다. ‘독서토론 입문과정’부터 시작해 리더과정, 심화과정, 고급과정까지 차례로 들으며 독서토론의 맛을 조금씩 알게 됐다.
독서활동가 양성과정을 마친 뒤 2017년 1월부터 ‘새벽독토 북클럽’이라는 책 모임을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다. 격주로 토요일 아침 7시에 숭례문학당에 모여서 한 권의 책으로 독서토론을 하는 모임이었다. “첫 모임을 하는 날 추위가 엄청났습니다. 새벽에 참가자들을 위해 떡 12인분을 준비했는데 모임 5분 전까지 아무도 안 오시는 거예요. 이 떡을 혼자 다 먹어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7시가 되자 다들 오셨어요.”
소중한 주말, 토요일 새벽부터 독서토론이 될까 싶었지만 지난여름까지 6년 동안 쉼 없이 약 150권을 토론했다. 그는 “한 번 토론할 때마다 5개의 토론 논제를 만들었고 지금까지 만든 책 논제만 700~800개에 이른다. 이 또한 소중한 자산”이라며 “토요일 오전 9시에 토론이 끝나면 주말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회원들의 만족도가 높았다”고 말했다.
‘새벽독토 북클럽’, ‘주경야독 북클럽’, ‘경영독토 북클럽’을 직접 운영했고 현재 진행하는 책 모임만 3개다. 숭례문학당에서 지향하는 아르더블유에스(RWS) 독서토론 리더과정처럼 책 읽기(리딩), 글쓰기(라이팅), 말하기(스피치) 모임으로 구성돼 있다.
책 읽기 모임인 ‘북하이킹 독서클럽’은 모바일 단체 대화방에서 매일 진행한다. 2주에 한 권 읽는데, 그가 정해준 분량 15~20쪽씩 회원들이 이어 읽는다. 각자 읽은 부분의 발췌나 단상을 올리면 서로 댓글을 꼼꼼하게 달면서 느낌을 나눈다. 온라인 책 모임이지만 책의 소감을 나누다 보면 회원들끼리 감정적으로 위로가 된다. “온라인으로 책을 읽은 느낌을 올리고 댓글을 달면 서로 친밀감을 얻을 수 있고,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대화하니까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른바 연결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죠. 사람들이 가장 느끼고 싶은 감정 아닐까요?”
말하기(토론) 모임인 ‘퇴근 후 북클럽’은 대면 모임이다. 직장인 등을 대상으로 제일 부담 없을 목요일 저녁에 격주로 토론한다. 그는 “직장인들은 목요일쯤 되면 심신이 지치는데, 2시간 정도 토론하고 나면 뇌가 각성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술 마시면서 사람들과 뒷담화하면 스트레스는 풀리는데 집에 갈 때 허탈하고 서글픈 기분이 들잖아요. 그런데 독서토론 뒤 집에 갈 때는 삶이 충만해지는 느낌을 받아요.”
첫 책 모임이었던 ‘서평독토’도 이제 그가 격월로 공동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화상회의 플랫폼에서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데, 각자가 쓴 서평을 낭독한 뒤 함께 느낌을 나누는 방식은 같다. 그는 “글쓰기 모임은 토론(말하기)·읽기 모임과 다른 결의 기쁨이 있다”고 했다.
성실하고 꼼꼼한 책 모임 운영이 소문나면서 도서관 등에서 ‘책 모임 리더 양성’ 교육과 강의 의뢰도 들어온다. 지난 1월30일 저녁 숭례문학당에서 열린 ‘어느 직장인의 책 모임 운영기’ 특강에는 30명 넘게 참석했다.
2015년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 가입
40대 후반 첫 서평쓰기 모임서 ‘충격’
독서활동가 양성과정 단계별로 수강
책모임 3개 운영·리더 교육 강의도
독서 팟캐스트·매일 ‘1인 1블로그’
“시민다운 삶 연습하는 민주 훈련장”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 시간까지 3시간 정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출·퇴근과 점심의 자투리 시간까지 활용해서 하루 보통 100쪽을 읽는다. 300~400쪽 책 한 권은 3, 4일이면 읽을 수 있다. 독서공동체를 시작한 뒤 엑셀에 기록한 독서 일지를 보면 1년에 보통 100~120권을 읽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다고 생각해요. 하루는 24시간이지만 각자의 시간은 다르죠. 남들보다 특별히 부지런한 건 아니지만, 하루의 시간을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시간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주도권을 제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2020년 첫날 ‘1일 1블로그’를 시작했다.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여느 새해 다짐처럼 ‘작심삼일’이 될까 우려했지만 3년 이상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그가 밝힌 비결은 새벽에 일어나면 무조건 30분 안에 어쨌든 글 하나를 써놓는다는 것.
“일단 써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스마트폰에서 조금씩 수정해 올립니다. 읽은 책이나 책 모임에 대한 기록, 일상생활이든 무엇이든 매일 꾸준히 글을 쓰고 기록을 축적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내 삶의 기록물을 계속 쌓다 보면 자기 내부에 있는 아픔과 괴로움을 치유할 수 있고 글쓰기 실력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요.”
‘OO을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라는 유행어는 책 모임에도 적용된다. “책 모임을 일단 해보면 독서토론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 그는 장은수씨가 쓴 <같이 읽고 함께 살다>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독서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좋은 시민의 삶을 연습하는 동시에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훈련장이다.”
글·사진 원낙연 선임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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