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사전 질문 아니면 질문 안 받겠다는 주중대사

김지성 기자 입력 2023. 2. 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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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중한국대사관. 지난해 8월 취임한 제14대 주중대사 정재호 대사가 베이징 특파원단을 대상으로 현안 브리핑을 진행했습니다. 취임 후 두 번째 공식 브리핑이자, 지난해 9월 이후 5개월 만에 재개된 브리핑입니다. 브리핑은 초유의 형식으로 이뤄졌습니다. 대사가 미리 준비해온 모두 발언을 원고대로 낭독한 뒤, 사전에 서면으로 접수받은 특파원단의 질문 3개를 대사가 직접 읽고, 역시 미리 준비해온 답변을 낭독하는 식이었습니다. 브리핑은 20분 만에 끝이 났습니다. 배석한 10여 명의 대사관 고위 인사들은 가만히 앉아 있다 돌아갔습니다. 현장에서의 기자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전에 접수받은 기자 질문은 지난 3일까지, 즉 사흘 전까지 접수받은 것들이었습니다. 주말 사이 중국발 한국 입국자 중 단기 체류자의 코로나19 양성률이 처음으로 '0'을 기록했고, 중국의 '정찰 풍선'을 놓고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이 충돌했습니다. 이런 '최신' 현안에 대한 기자단의 질문 기회는 봉쇄됐습니다. 정 대사는 앞으로도 이런 식의, '사흘 전까지 접수된 서면 질문에 한해서만 답하는' 식의 브리핑을 유지할 것이란 입장을 대사관을 통해 특파원단에 전해왔습니다.

6일 브리핑에서 발언하는 정재호 주중대사(가운데)

"사흘 전 서면 질의에 한해 답변"…"대통령도 이런 식으로 안 해"

특파원단에선 반발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브리핑의 유례를 찾기 힘들 뿐더러 대통령도 이런 식으로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묻자 대사관 관계자는 "브리핑에 대한 대사관의 우려가 있어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마련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해 9월 첫 브리핑 당시 일부 특파원의 브리핑 원칙 파기를 지적했습니다.

정재호 대사와 대사관 측이 '브리핑 원칙 파기' 사례로 든 기사는 대사의 일문일답 내용을 기사화한 것이었습니다. '전임 대사 때와 달리 왜 대사가 참가하는 행사 등에 대한 보도자료가 없느냐'는 질문에 정재호 대사가 "대사를 처음 해 봐서 몰랐다"고 답했고, '소통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취지의 질문엔 "업무추진비 넉 달 치를 행정직원 추석 선물에 기부해 업무추진비도 없다"고 답했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대사관 측은 이 기사가 '브리핑의 모두 발언은 실명 보도하되 일문일답은 비실명 보도한다'는 브리핑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보도 내용은 차치하고 정재호 대사의 실명을 거론해 보도한 것 자체를 문제삼았습니다.

특파원단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대사관 측의 문제 제기로 지난해 10월 특파원단이 총회를 열어 투표한 결과, 참석자 30명 중 24명이 브리핑 원칙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원칙 위반이라는 응답은 4명, 기권 2명이었습니다. 통상 외교 현안에 대한 브리핑에서 기자들이 비실명 보도를 하는 이유는 외교적 상대방이 있어 실명 보도시 국익이 훼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인데, 정재호 대사의 해당 발언은 이런 국익과는 무관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해당 기사의 일부 내용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용되는 대사 업무추진비의 부적절한 사용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이 기사 이후 대사관은 "행정직원 격려품을 일부 업무추진비에서 지출할 예정이었으나 여러 상황을 감안해 취소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특파원단은 총회를 거쳐 "대사와 특파원단 사이의 갈등은 오히려 브리핑에 임하는 대사의 권위적인 태도와 부적절한 발언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브리핑 규정 위반 여부는 획일적으로 재단할 수 없으며, (다른 출입처 기자단이 하는 것처럼) 사례에 따라 특파원단이 자체적으로 판단하겠다"는 입장을 대사관 측에 공식 전달했습니다.
 

국감에서도 대사 · 특파원단 갈등 화두…"소통하겠다" 답하더니

정재호 대사와 베이징 특파원단의 갈등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화두가 됐습니다. 무소속 김홍걸 의원은 "교민 사회에선 '대사께서 오셔서 중국 측과의 네트워크 강화, 또 코로나 때문에 피해를 많이 본 교민 사회를 돌봐주는 활동을 바쁘게 하셔도 시원치 않을 시간에 특파원들과 싸움하고 있느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꼬집었고, 국회의장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박병석 의원은 "현실적으로 국민과 소통하려면 언론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맞다"며 "특히 4강 대사들은 기자들과 소통의 시간을 더 늘려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부임한 일본 대사와 비교하면 정재호 대사의 대언론 활동이 굉장히 부족하다"는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의원의 지적에 당시 정재호 대사는 "어떻게 언론과 소통할 것인지 여러 가지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며 "앞으로 좋은 결과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리라 생각된다"고 답했습니다. 이후 정 대사와 대사관 측이 내놓은 방안이 바로 '사흘 전 서면 질의에 한해서만 답하겠다'는 방식입니다.

정재호 대사는 국감 마무리 발언을 통해 "많은 공무원들은 사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면서 "특파원들이 (브리핑) 룰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제공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정재호 대사 이전까지만 해도 대사와 특파원단의 브리핑은 문제 없이 진행됐습니다. 대사관 측이 먼저 나서 브리핑 원칙을 문제삼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사 브리핑이 끝난 이후에라도 '우리 외교나 국익에 우려가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대사관 측이 비실명 보도를 요청하거나 아예 비보도를 요청해도 특파원단은 대부분 수용했습니다. 특파원단도 국익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정재호 대사 부임 이후 이런 문제들이 '갑자기' 불거졌는지, 특파원단에게만 원인을 돌릴 게 아니라 정 대사 본인도 자문해 볼 일입니다.
 

정 대사 취임 일성으로 소통 · 원팀 강조…"중국 외교부보다 못해"

정재호 대사는 지난해 8월 취임사를 통해 "무엇보다 한·중 간 안정적인 소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소통 채널의 숫자나 빈도보다는 문제가 발생하거나 위기시에도 닫히지 않고 소통이 가능한 경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어 "국민과 대통령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국익 수호라는 임무를 다하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국익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원팀이고 또 꼭 그래야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재호 대사는 윤석열 대통령의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0여 명에 불과한 자국민 특파원단과도 제대로 소통이 안 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가 권위적이고 불통이라 비판하는 중국 정부도 외교부 대변인 브리핑에선 내신은 물론 외신의 질문도 즉석에서 받아 답합니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한국의 4강 대사와 대사관이 중국 외교부보다 소통을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김지성 기자jisu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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