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등딱지

한겨레 2023. 2. 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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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게티이미지뱅크

[숨&결] 이광이 | 잡글 쓰는 작가

엊그제 토끼띠 새 달력을 걸었는데, 벌써 입춘이 지났다. 어릴 때는 그리도 안 가더니, 머리 희끗해지고는 세월 가는 것이 보인다. 유년에 기다가 청년에 걷다가 장년에 이르러 달려간다. 노년의 시간은 날아가려나?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산들이 뾰족뾰족하다. 나목의 능선은 창을 들고 늘어선 군사들의 행렬 같고, 살이 발린 생선의 등뼈 같기도 하다. 그 사이로 희끗희끗 잔설이 있는 산의 속살이 들여다보인다. 겨울 산은 멀리서 보면 무채색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노랑과 분홍, 연두와 보라 같은 여러 색을 나무 끝에 품고 있다. 그 끝들이 모여 색을 이룬다. 봄에 펼 색색의 잎들, 새봄으로 날아갈 화살촉같이 생겼다.

몇해 전 겨울 아침,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아침에 세수하는 손가락 사이로 왔다가 저녁에 양말 벗는 발가락 사이로 사라져버리는 것, 그것이 세월”이라고, 중국 시인 주자청(주쯔칭)의 글에 나오더라고. 어머니는 재미있으면서 속 깊은 말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덧붙인다. “하루가 번쩍 가버리고, 일년도, 십년도 금방이더라. 아야, 갯가에 다니는 칠게 있잖냐, 칠게를 잡아놓은 대통발이 엎어지면 뚜껑이 열리면서 게가 쏟아져 나오지. 그것들이 살라고 뻘밭을 뻘뻘뻘뻘 빨리도 기어가잖아, 세월이 그런 거 같더라.” 한해가 365개의 날들을 가지고 열리는데 시작하자마자 뿔뿔이 사라져버리더라는 얘기다.

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게 철인 봄이 되면 꽃게 값이 싸다. 산 것 1㎏에 2만원 못한 정도, 저울에 네댓마리 오른다. 어느 봄날, 아랫집에서 간장 끓이는 냄새가 솔솔 올라와 우리 집도 게장을 담갔다. 이틀 지나 한마리를 꺼내 펼쳤다. 살이 실하고, 등딱지에 알이 꽉 찼다. 그것을 비벼 먹으려고 내 젓가락이 나가려는 순간, 딸내미의 젓가락이 먼저 가닿는다. 내가 주춤하는 잠시, 비행접시 같은 그것이 기우뚱 이륙하더니 딸의 밥그릇에 미끄러지듯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내 젓가락은 허공을 맴돌다 김치를 집어 돌아왔다.

나는 순간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직감했다. 60년 전 그것은 조부의 몫이었고, 30년 전에는 아버지 입으로 들어가던 것, 이제는 의심 없이 내 차지이겠거니 했는데, 이 난데없는 상실은 무엇인가? 어린 내 젓가락이 등딱지를 향해 나아갈 때, 나보다 먼저 집어 아버지 밥그릇에 올려주던 어머니의 눈빛이 생각난다. 김 한장을 9등분해 먹던 시대, 그때 기득권은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지금 성역 없이 젓가락을 날리고 있는 딸에게 그것은 구한말부터 아비의 몫이었다고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이런 삽화가 나온다.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송골매가 날아오더니 마당의 어미 닭 한마리를 채어 사라져버리는 장면. 조선 최고의 거상 임상옥은 그 순간 깨닫는다. 상운(商運)이 다했음을, 그리고 ‘오사필의(吾事畢矣, 내 일은 끝났다)!’라는 말을 남기고 거기서 장사를 접는다. 난데없는 상실에서 한 소식을 듣는 빛나는 대목이다.

올해는 베이비붐 세대의 막내인 토끼띠들이 정년을 맞이하는 해. 1955년부터 베트남전쟁 참전 전해인 1963년까지, 하도 많이 낳아 병원 복도에서도 출산했다는 그 세대가 역사의 뒷장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헝그리 정신과 가부장제의 한 시대가 온전히 저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그날 밥상머리에서 일거에 깨달았다. 가문의 순리와 누대의 독점체계가 더는 세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신의 노후를 책임지는 첫 세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며,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흘러갈 것인지를.

임상옥은 그날 이후 부채장부를 불태우고, 직원들에게 작은 금덩이를 들려 귀가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여생을 보내는데, 그것은 돈 그만 벌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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