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신앙의 미래 [세상읽기]
[세상읽기]
[세상읽기] 한승훈 | 종교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박정희 신앙은 20세기 한국 정치문화의 부정적인 유산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신앙’이라는 용어에 풍자나 조롱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연구자에게 있어 이것은 뭔가 신성하게 여겨지는 것과 관련된 사람의 믿음이나 상상력, 실천 같은 것을 객관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한때 박정희 신앙은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발전 성과를 한 사람의 치적으로 집중시키는 대중적인 공민종교(civil religion)였다. 민주화 이후 21세기 초까지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으로 꼽혔다.
물론 과거 독재자에 대한 종교적 숭배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주로 비교적 최근까지 왕정 통치를 경험하였고, 근대 이후 정치발전이 더뎠던 지역에서 폭넓게 나타난다. 왕정은 통치자와 그 가문에 대한 신화와 의례를 통해 지탱되는 정치체제다. 왕가의 시조는 신성한 운명을 타고난 영웅적인 인물이고, 그 권위는 혈통을 통해 전승된다. 물론 다른 정치집단에 비해 통치자 가문이 특별히 잘났다는 걸 객관적 지표로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교육 과정에서 “위대한 지도자”의 집안을 신성화하는 ‘신화’를 머리에 새기고, 평생에 걸쳐 그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례’를 몸에 새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에는 500년 이상 지속됐던 왕가가 20세기 초까지 남아 있었고, 비교적 고전적인 왕정 전통을 가지고 있는 식민제국의 통치를 수십년이나 받았다. 왕정은 하나의 구조이고, 구조는 공백을 채우려 하는 특성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과 만주국을 근대국가의 모델로 여기고 있던 박정희는 “천황”과 “국체”가 사라진 공백의 자리에 “조국”과 “민족”을 채워 넣었다. 그것은 왕정식 혈통 숭배를 근대국가에 그대로 이식한 북한 체제 등에 비하면 분명 덜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교육을 받았던 세대에게 국민교육헌장이나 국기게양식은 황국신민서사나 동방요배의 너무나 익숙한 대체물이었을 것이다.
종교사적으로 박정희 신앙의 흥미로운 지점은 민주화 이후 그런 제도적 기반들이 약화한 뒤에도 박정희에 대한 종교적 숭배의 정서는 더욱 강화됐다는 것이다. 독재자가 시민저항이 아닌 암살로 최후를 맞게 되면서,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줬다는 기복적 지도자 서사에 비극적 영웅신화가 덧씌워졌다. 대놓고 박정희의 외모, 말투, 슬로건을 모방하는 정치인들이 인기를 끄는가 하면, 21세기 이후에는 박정희의 혈통을 내세운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박정희 신앙에 관해서는 ‘신학적’인 연구서까지 나와 있다. <신이 된 대통령>이라는 이 책의 저자는 박정희의 사위인 신동욱이다. 책은 각 종교전통의 인물 숭배 사례, 전국 각지 사찰에서의 박정희, 육영수 영정 봉안 현황과 관련 의례들, 그리고 신에 대한 종교학적 논의들의 요약으로 구성돼 있다. 대부분의 ‘이론적’ 내용은 인터넷 자료 같은 것을 그대로 붙여놓은 수준이지만, 답사 내용만은 상당히 충실하다. 여기에 의하면 박정희 부부는 여전히 각종 불당, 명부전, 신중단, 영전각 같은 다양한 공간에서 신도들의 공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종교전통에서 적통에 해당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2세대 교주들이 흔히 겪는 카리스마 계승 전략의 실패를 겪었다. 대선과 탄핵 정국 동안 주목받은 박근혜의 개인적인 종교는 아마도 최태민 일가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을 우주론과 영적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인식으로 이뤄져 있다. 물론 이는 그를 지지한 이들의 박정희 신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감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정치적 몰락의 한 요인이 되었다. 오히려 이런 형태의 신앙은 “종교 비슷한 수상한 무언가”가 최고 권력자의 주변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인식이 오늘날 정치문화에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최근 박정희 신앙은 박정희 생가에 있는 의례 공간인 숭모관을 대규모로 확장, 신축하려는 경북 구미시의 계획이 알려지면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은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이곳에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의 추모관이 너무 협소하다”며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지난 세기의 산물인 기괴한 종교현상을 자연적으로 쇠퇴해 가도록 둘지, 공적 영역으로 복귀시킬지 한국 사회가 결정해야 할 시기가 왔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잠든 새벽 4시에 덮친 7.8 강진…“이런 충격은 느껴본 적 없다”
- 윤 대통령 격노에 일정 ‘철회’…안철수의 선택은?
- 관리비, 집주인보다 무려 10배 더 낸다…원룸살이 ‘겹설움’
- 튀르키예 7.8 대지진…최소 640명 사망, 피해 더 늘 듯
- 나경원 때리던 국힘 초선들, 도로 찾아가 “마음 아팠다”
- 이태원 유족 “지하 4층에 분향소? 굴 속 들어가있으란 건가”
- “우크라 그곳은, 고기 분쇄기”…러 ‘수모의 시간’ 안 끝내는 이유
- ‘경찰국 반대’ 총경 대거 좌천에 반발…류삼영 “보복·길들이기”
- 국회 앞 ‘간신배 윤핵관’ 퇴진 시위…“간신배를 달리 뭐라 부르나”
- 조국 딸 조민 “난 떳떳하다, 검찰은 스스로에게 같은 잣대 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