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임보라 목사와 ‘다음 소희’, ‘어른 김장하’ [편집국에서]

박미향 2023. 2. 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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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영화 <다음 소희>의 한 장면. 배급사 제공

[편집국에서] 박미향 | 문화부장

지금 한국 사회에는 악당(빌런)이 넘쳐난다. 지난 4일 고인이 된 임보라 목사의 부고 기사에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고 폭력적인 악성 댓글들이 달렸다. 급기야 장례위원회가 “포털 기사의 댓글 노출 및 댓글 기능 중단”을 각 언론사에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평생을 성소수자 차별 철폐와 평화운동에 몸담은 이가 음험한 온라인 악당들의 먹잇감이 되다니, 참담하고 개탄스럽다. ‘당쟁’에만 몰두하며 이런 악당들이 판치도록 방관하는 정치인들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악당들이다.

신혼부부나 20~30대 청년들의 돈을 갈취한 또 다른 악당 ‘빌라왕’들이 얻어간 부당수익은 수천억대에 이른다. 피해자들이 입은 상처는 경제적 손실만이 아니다. 더는 이 사회 시스템을 믿을 수 없게 됐다.

최근 수년간 한국 드라마 시장의 대세가 복수극이 된 건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학교폭력 가해자들 응징에 나선 <더 글로리>와 <돼지의 왕>, 자신의 삶을 회귀해서 복수에 나서는 주인공 이야기인 <어게인 마이 라이프>, 곧 시즌2가 시작되는 <모범택시>나 <천원짜리 변호사>, 최근 인기 상승 중인 <법쩐> 등은 악당이 활개 치는 현실이 반영된 복수 콘텐츠다.

하지만 과거 복수극에 견줘 뚜렷한 차별점은 악인이 법에 따른 처벌을 받고 마는 권선징악이 아니라, 피칠갑도 마다치 않는 살벌한 사적 복수가 스토리의 근간이라는 점이다. 시청자들은 과거라면 논란이 됐을 복수의 정당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물을 이기려면 괴물이 돼야 한다’는 주인공에 공감하며 사적 복수의 완성에 지지를 보낸다. 대중문화는 한 사회의 바로미터다. 악당들의 악행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희망은 있는 걸까.

영화 <다음 소희>와 다큐 <어른 김장하>에서 미력하게나마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다음 소희>는 2017년 전주의 한 콜센터로 실습 나간 18살 고등학생의 극단적인 선택을 모티브 삼은 실화 배경 영화다.

고교 졸업반 소희(김시은)는 부푼 꿈을 안고 콜센터로 실습 나가지만 실적 압박, 임금 착취, 죽음조차 하찮게 취급하는 조직문화 등 가혹한 현실에 혹사당하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간다. 끝내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형사 유진(배두나)이 이 사건 수사에 나선다. 배두나는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날것 그 자체로” 소리치며 “애도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연기했다고 했다. “더 나은 세상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고, “작은 목소리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영화들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정주리 감독은 전작 <도희야>에서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아동폭력 문제를 꼬집은 바 있다. 배두나는 ‘작은 목소리’를 큰 함성으로 만드는 데 동참하기 위해 <도희야> 제작에 노 개런티로 참여했다고 한다. 현실 악당들의 추악한 행태를 집요하리만치 스크린을 통해 까발리고 추적하는 정 감독과, 흔쾌히 이 여정에 동참한 배두나는 희망의 작은 불씨 같은 존재들이다.

다큐 <어른 김장하>의 한 장면. MBC경남 제공

한편, 지난해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 방송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MBC 경남)는 뒤늦게 화제가 되면서 유튜브 조회수가 폭발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평생 실천한 진주 한약방 ‘남성당’ 주인 김장하 선생의 삶을 다뤘다. 사학재단 헌납, 여성쉼터 지원, 장학금 제공 등 그의 선행은 “아픈 사람으로 벌어들인 돈이니 병든 사회를 고치는 데” 써야 한다는 평소 철학에 따른 것이다.

한사코 인터뷰를 마다하는 그를 세상에 끄집어낸 이는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 감동을 증폭시킨 이들은 김현지 피디와 제작진. 다큐 유튜브에 ‘좋아요’를 누르고 에스엔에스(SNS)에 상찬을 남긴 이들과 김주완 기자, 제작진은 분명 악당들이 두려워해야 할 존재들이다.

본래 고 임보라 목사의 추모문화제는 6일 장례식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가 돌연 연기됐는데, 그 이유가 “빈소의 규모에 비해 조문객 수가 매우 많아”서란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란 고정희 시인의 시가 생각나는 건, 임 목사의 여백이 ‘다음 소희’와 ‘어른 김장하’ 팀, 추모객이 함께하기에 차고 넘칠 정도로 넓고 깊기 때문이다. 여백이란 또 다른 탄생이다. 악당들을 처치할 ‘어벤저스’가 아직 우리 사회엔 넘친다.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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