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한의 일본 탐구 <30> 난세를 이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리더십] 인내하는 사람이 최후 승자 “인생은 절대 서둘러선 안 된다”

최인한 2023. 2. 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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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왼쪽)와 그를 주인공으로 1월부터 방영 중인 NHK 대하드라마 ‘어떡 할래 이에야스(どうする 家康)’. 사진 NHK
최인한시사일본연구소 소장 일본 전문 기자, 전 일본 유통과학대학 객원교수, ‘일본에 대한 새로운 생각’ 저자

지금은 ‘난세(亂世)’다. 인류 역사상 혼란스럽지 않은 때가 없었지만, 2023년은 힘든 시기임이 분명하다. 코로나19 사태로 3년간 어려움을 겪은 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정세도 예측불허다. 미·중 갈등과 디지털 전환기를 맞아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고조되고 있다. 인간은 위기를 만나면, 위대한 영웅을 갈망한다. 올해 일본에서 난세의 무장,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 1616)가 다시 소환된 배경이다. NHK 대하드라마 ‘어떡 할래 이에야스(どうする 家康)’가 1월부터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주인공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은 인기 아이돌그룹 아라시 멤버인 마쓰모토 준(松本潤)이 맡았다.

일본 전국시대의 3대 무장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약칭 이에야스)다. 일본 사람은 이들 가운데 이에야스를 가장 좋아한다. 외유내강형 이에야스가 일본인의 기질에 잘 맞기 때문일 것이다. 100여 년의 대혼란기를 끝내고, 최후의 승자가 된 이에야스의 리더십을 소개한다.


이에야스 승리 비결, 인내와 기다림

일본인 사이에 많이 회자하는 얘기가 있다. “울지 않는 새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세 장수의 대응법을 다룬 내용이다. 성질이 불같은 맹장(猛將)인 오다는 “바로 목을 친다”, 지장(智將)인 도요토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울게 만든다”, 덕장(德將) 스타일의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로 설명된다. 

이에야스는 일본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던 전국시대를 ‘인내’와 ‘기다림’으로 살아남았다. 17세에 첫 전투를 시작으로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이인자로 있다가 오다와 도요토미를 누르고 최후의 승자가 됐다.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 당시 세력이 강했던 오다에 이어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 혼돈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의 문을 연 오다와 도요토미 밑에서 오랜 기간 묵묵히 힘을 길렀다. 도요토미가 사망한 후 정권을 잡았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를 세워 메이지유신(1868년)까지 260여 년의 평화 시대를 열었다.


고난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50년 이상을 전쟁터에서 보낸 이에야스가 후손에게 남긴 ‘유훈집’에는 성공 리더십의 핵심 내용이 담겨 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절대로 서둘러서는 안 된다.” “인생에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진다.” 이 글귀만큼 고되고 험난했던 이에야스의 인생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 그의 유훈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새기고 사는 경영자나 정치인이 적지 않다.

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힘이 약한 영주는 더 강한 영주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무릎을 꿇어야 했다. 내가 살기 위해 형제와 친인척을 죽이고, 동료를 배반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전국시대에 무장으로, 영주로 살아남기 위해선 강자가 돼야 했다.

이에야스의 유년기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가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됐다. 그는 3세 나이에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유력 영주인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넘겨진다. 이에야스가 맞닥뜨린 첫 번째 시련이다. 이어 6세 무렵에 오다 가문의 인질이 되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549년에는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가 23세로 세상을 떠난다. 오다 측은 인질인 이에야스를 이용, 그의 영지인 미카와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 어린 나이의 이에야스는 주변 영주들의 세력 재편에 따라 인질 생활을 계속했다. 성년이 되고, 결혼한 뒤 옛 고향을 찾은 이에야스에게 시련은 계속 이어졌다. 무질서한 전국시대에 힘이 약한 영주와 그의 밑에 있는 신하와 백성이 겪어야 할 운명이었다. 


실력과 정공법으로 맞서다 

이에야스는 경쟁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처럼 ‘천재형’ 무장이 아니었다. 지략이나 전략에선 도요토미에게 못 미쳤다. 그럼에도 정정당당하게 힘을 길러 뚝심으로 최후의 승자가 됐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일본 국민에게 추앙받는 것은 전국시대 전투에서 보여준 ‘정공법’ 덕분이다. ‘인내의 상징’인 이에야스는 서방 연합군에게 패한 일본 국민에게 큰 위안이 됐다. 글로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에야스의 인기가 일본 내에서 다시 치솟는 이유다. 

이에야스는 야전에서 자웅을 겨루는 전투를 선호했다. 모략이나 장기 포위전이 아니었다. 그의 전투는 늘 평범하고 재미없는 ‘정공법’이다. 그는 무력 신봉자였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판단되면 깨끗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는 이마가와에게 복종했고, 오다와 도요토미에게도 깨끗이 고개를 숙였다. 정정당당한 무력을 내세운 이에야스는 천재적인 무장을 이기고 승리자가 됐다.


경제력이 최종 승패를 결정한다

전국시대에 ‘쌀’은 부(富)의 상징으로 ‘권력’을 의미했다. 영주들의 세력 규모는 영지 내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으로 비교됐다. 쌀을 많이 확보한 영주들이 더 많은 무사를 고용하고, 보수를 줄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영주의 연간 쌀 생산량은 50만~ 150만 석 규모였다. 오다의 쌀 생산량은 전성기 시절(1586년) 245만 석에 달했다. 패권을 잡기 직전 이에야스의 쌀 생산량은 133만 석 정도였다. 에도(옛 도쿄)로 영지를 옮기면서 영지 내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금, 은 광산을 많이 보유해 강한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매우 검소했다. 금,은 생산량이 전국 영주 중 가장 많았으나 지출에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부’의 축적을 지속적으로 장려하고, 불필요한 낭비를 줄인 ‘경제 제일주의’ 정책이 승리의 원동력이다. 


강한 자에게는 배운다

이에야스는 학구열이 높았다. 자기보다 강한 장수들의 장점을 철저히 받아들였다. 일본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그는 모리 모토나리(1497~1571)와 다케다 신겐(1521~73)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모리는 이에야스보다 앞선 시기에 활약한 무장이다. 모리는 학문을 중시하고, 포위전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죽기 전에 장남에게 “우리 일족에게 호의를 가진 자는 다른 지방은 물론 우리 영지 안에도 없다”고 유언했다. 즉, 가신의 충성에 대해서도 “사람에 따라 시절에 따라 변하는 법”이라며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했다.

다케다는 이에야스의 전략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손자병법의 풍림화산(風林火山)과 기마전법을 일본에 도입하고, 강력한 공격전으로 이름을 떨쳤다. 최후의 승자가 되려면 ‘여유’를 갖고 전투에 임해야 한다는 게 다케나의 평소 지론. 그는 “장기전에서 승리하려면 여유를 가져야 한다”며 “전투는 70% 승률을 목표로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실전 경험 중시하는 경험주의자

100여 년간 지속됐던 전국시대의 승자를 결정짓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1600년 벌어졌다. 이에야스의 동군과 도요토미 히데요리(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의 서군이 패권을 놓고 펼친 전투다. 서군 대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복이던 이시다 미쓰나리였다. 그는 학식이 깊고 충성심이 강한 뛰어난 참모였지만, 전투 실전 경험이 적었고, 리더십이 부족했다. 반면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이에야스는 50년이 넘는 실전 경험을 가졌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실전 경험이 많은 야전군 사령관과 머리 좋은 참모 출신 장수와의 싸움이었다. 결국, 도요토미군의 내부 모반이 이에야스군에 결정적 승리를 가져왔다. 

이에야스는 말년에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권력을 잡은 후손들이 겸손한 자세로 통치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승자가 된 이에야스의 처세술은 ‘인내’와 ‘겸손’이다. 그는 인내에 인내를 거듭해 일본을 얻었고, 자손에게 그 지위를 물려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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