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해외기술 유출, 이대로 놔둘건가

2023. 2. 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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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해외 기술유출 범죄자에 대한 중형 처벌이 가능한가요? 범인 검거 시 유출된 기술을 국내로 회수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 법률이 가진 맹점인데요, 법정에서 기술유출 입증이 어렵고, 처벌 수위도 낮아 중형 선고는 사실상 힘듭니다. 유출된 기술도 사실상 돌려 받을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지난달 26일 해외 기술유출범 검거에 대한 특허청의 브리핑 과정에서 나온 질의응답의 일부 내용이다. 국내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전직 직원들이 첨단기술이자 국가 핵심기술인 반도체 웨이퍼 연마공정과 연마패드, 연마제 등의 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리려다 검거된 사건이었다. 피해를 입은 3개 기업 중 가장 작은 회사의 기술 유출에 따른 경제적 피해액만 1000억원 이상에 달할 것으로 추정돼 반도체 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알려지기 10일 전에도 비슷한 반도체 기술 유출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 반도체 기업 소속의 한 연구원이 퇴직한 후 '반도체 세정장비' 도면을 중국에 유출한 혐의로 기술유출 브로커, 협력사 대표 등과 함께 구속 기소된 것이다.

그 중에서 기술유출 브로커는 앞서 지난해 5월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 받았지만, 이후 법원의 보석 결정으로 석방됐다가 이번에 추가 혐의가 적발되면서 다시 구속 기소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을 통해 최근의 기술유출 범죄가 퇴직 직원에 한정되지 않고, 브로커 개입을 통해 은밀하고 치밀하게 이뤄지는 등 점점 조직화·고도화·지능화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보다 앞선 지난해 10월에도 국내 반도체 대기업의 전·현직 연구원과 협력사 임직원 10명이 이직 과정에서 해외에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 처벌을 받는데 그쳤다. 기술유출 범죄가 한 번 발생하면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초래하는 점을 감안할 때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잇따라 발생한 해외 기술유출 사건에서 보듯이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국내 처벌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특히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한층 격화되고, 첨단기술의 해외 유출이 경제안보와 직결되는 상황에서 법적 처벌을 강화하지 않고선 늘고 있는 기술유출 범죄를 막을 수 없고, 우리의 기술도 제대로 보호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각국이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면서 해외 기술유출 범죄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송기헌 의원실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8∼2022년 8월) 총 506건에 걸쳐 1501명의 기술유출 사범이 검거됐으나, 일명 '산업 스파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건은 88건에 4명(4.5%)만이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을 뿐이다. 이마저 2심과 3심에서 기술유출 입증이 어렵고, 피의자가 초범이라는 점으로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감경되기 일쑤다.

국가의 산업 경쟁력과 국가경제 안보 측면에서 심각한 위협이 되는 기술유출의 심각성에 비해 처벌이 지극히 가볍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기술 보호를 위하나 제도적 장치 보완이 시급하고,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법적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우리와 달리 선진국은 기술유출 범죄에 매우 강경하게 대응한다. 미국은 연방경제스파이법에 따라 1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달러 이하의 벌금을, 일본은 10년 이상의 징역 또는 3000만엔 이하의 벌금을 각각 부과하는 등 강력히 처벌하고 있다.

미국,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법정형을 보면 낮은 수준은 아니지만, 재판을 통해 실제 선고되는 형량은 법정형과 비교할 때 처벌 수위가 약하다. 재판 과정에서 초범 등 감경 사유를 적용하면 선고형은 더 줄어들 수 밖에 없어 법적 실효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안고 있다.

실제로, 산업기술보호법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처리된 형사사건 1심을 기준으로 법원이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처리한 835건 중 집행유예는 301건(36%), 벌금형 215건(25%), 무죄 191건(22%) 등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징역형은 고작 83건(9.9%)에 불과했고, 징역형도 1년 6개월 이하여서 법망이 허술하다.

이렇다 보니 최근 들어 이런 법적 처벌 취약성과 한계를 이용한 기술유출 범죄가 더욱 성행할 뿐 아니라, 계획적·조직적 범행을 위한 기술유출 브로커들도 활개치고 있다. 미중 기술패권으로 시작된 글로벌 기술 전쟁은 국가의 미래와 생존을 좌우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과거 국가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시되던 '지정학 시대'가 저물고, 기술패권이 국제 질서의 핵심 변수로 작용하는 '기정학 시대'를 맞고 있다. 기정학 시대를 맞아 우리가 애써 개발한 기술을 잃은 후에 법적 장치를 강화하는 '망양보뢰'(亡羊補牢·양을 잃고 나서 우리를 고친다)의 우(愚)를 되풀이 해선 안 될 것이다.

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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