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건축가 마야 린 ‘물빛 구슬’로 담은 남과 북

2023. 2. 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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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서울 개인전 참석차 방한
경계 뛰어넘은 자연 표현한 신작
늘 환경·정치적 이슈 예술로 소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로 꼽히는 마야 린

물빛 구슬이 조르르 모였다. 한 줄로 구불구불, 유기적 흐름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무리가 지어져 양감이 두툼하다. 꼭 어린시절 가지고 놀던 구슬치기 구슬같다. 조명이 닿자 투명한 물 그림자가 진다. 햇볕 아래서 윤슬처럼 반짝이던 구슬의 잔상이 갤러리 전시장의 하얀 벽 위에 겹친다. 끊임없이 이어지고 흘러가는 강을 표현한 이 작업은 마야 린(Maya Lin·64)의 신작, 구슬한강댐(Marble Han River Dam, 2022)이다.

“남북한의 정치적 관계를 뛰어넘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와 관련한 지도를 찾고 이를 기반으로 여러 번 드로잉하면서 발전시킨 작품이다. 북한 정보는 사실 부족한 편이라, 분단 이전 지도를 참고했다. 남북이 분단됐지만 물과 산맥은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다” 작가의 설명은 페이스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의 제목과도 일맥상통한다. ‘자연은 경계를 모른다’(Nature Knows No Boundaries).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로 꼽히는 마야 린을 헤럴드경제가 직접 만났다. 페이스 서울에서 열리는 개인전에 참석차 방한한 그를 ‘차담(茶談)’을 핑계로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전시는 지난 1월 19일에 오픈했지만 방문은 늦어졌다. 올해 다보스포럼에서 크리스탈 어워드를 수상했기 때문이다. 〈헤럴드경제 1월 22일자 ‘다보스포럼에 선 예술가 “미래는 바뀔 수 있다”’ 기사 참조〉 그는 그곳에 모인 전세계 정재계 리더들 앞에서 “지금 행동을 바꾸면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Vietnam Veterans Memorial, 1982 National Mall, Washington D.C. [마야 린 공식홈페이지 캡쳐]

그의 40년 작업을 살펴보면 그를 수식하는 수많은 단어들을 납득하게 된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업은 미국 워싱턴 D.C.에 자리 잡은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1982)다. 공원의 대지를 칼로 잘라내 상처를 드러낸 듯한 형태로 두 개의 긴 검은 화강암 벽이 125도 각도를 이루며 만난다. 양 끝은 지면과 같은 높이이나, 두 벽이 만나는 지점은 경사로를 따라 점점 낮아진다.

벽엔 베트남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미국인 5만5000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관람객들은 연대기 순으로 쓰인 이름을 보고 지나간 시간을 가늠한다. 멀리서 보면 책 형태이기도 한데, 마야 린이 공모전에 설계안을 제출했을 당시 나이는 23세. 예일대 4학년 재학 중이었다. 공모전에 참여한 인원은 1400명이 넘었다.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는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전쟁기념비처럼 영웅적이거나 희생을 강조하는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압도하지 않고 풍경 안에 통합되는’ 방식이 어색했던 것이다. “전쟁에서 누군가를 상실하면, 그 고통은 살을 베는 것과 같다고 한다. 다치면 언젠가 낫는다. 그러나 흉터는 남지 않나” 공원의 땅을 갈라서 노출시킨 그의 작업 앞에서 방문객들은 숙연해진다.

Riggio-Lynch Interfaith Chapel, 2004 Haley Farm, Clinton, Tennessee [마야 린 공식홈페이지 캡쳐]

마야 린이 설계한 이곳은 매년 400만명이 넘는 인파가 찾는다. 작가는 수상 당시 “전쟁 기념관은 군인들의 용맹함이나 전쟁의 결과를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인류의 비극을 참회하고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2016년 대통령 자유훈장을 수여하면서 린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에 대해 “우리가 희생과 애국심,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이후 작가는 여성 권리(예일대 Women‘s Table·1993), 시민권(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시민평등권 기념센터·1989),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 기후위기 등 우리시대 주요 문제들을 예술과 과학을 넘나들며 환기해 왔다. 최근 그가 가장 관심을 갖는 주제는 기후위기, 즉 자연과 생태다. ’무엇을 잃어버렸는가(What is Missing?)‘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그는 스스로 이것이 마지막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진심으로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고 예술이 무엇인가 변화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2021년 5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공원엔 다 죽어가는 삼나무 49그루가 심어졌다. 초록이 울창한 나무들 사이 키가 큰 회색의 가지만 앙상한 나무는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기괴하다. ‘유령 숲(Ghost Forest)’이라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What is Missing’의 기념비 작업이다. 가뭄이나 산불, 병해충, 해수면 상승으로 숲이 소멸해가고 있음을 뉴욕 한복판에서 6개월 동안 알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고사하는 나무들 앞에서 기후변화가 먼 곳의 일이 아님을 다시 깨닫는다.

구슬한강댐, Nature Knows No Boundaries전, 2023, 페이스 서울 전시전경.

이번에 페이스 서울에서 전시하는 연작들도 ‘What is Misssing’ 프로젝트의 연장선 상에 있다. “예술가로 지금 우리 발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는, 벌어지고 있는 자연현상에 집중하고자 했다. ‘물은 내 작업의 큰 주제’라는 작가는 오염으로 인한 수자원의 고갈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물이라는 존재와 사랑에 빠져있다“고 고백한다. 물이 흘러 지형을 구성하는 방식, 그 유기적 형태의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물이 주는 생명력에도 매료됐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궈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도 그 지류를 섬세하게 복원한 조각작업으로 선보인다.

마야 린이 다룬 이슈들은 가볍지 않다. 여성, 시민권, 아메리카 원주민, 환경 등 가장 정치적 갈등이 첨예한 사인을 예술로 소화한다. 쉽게 상상하지 못할 탁월한 방식으로. “나는 (이같은 접근을 통해) 역사를 좀 더 정확하게 기억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똑바로 바라보라는 그의 일침이다. 아직도 소녀스러운 외모 아래, 무엇으로도 부러트릴수 없을 단단한 고갱이가 읽힌다.

그는 건축가, 예술가, 활동가를 넘나든다. 그럼에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예술가적 자신이다. “나의 작업은 크게 3각으로 이루어진다. 예술·건축·기념비 작업이다. 각각 독립적이지만 서로 균형을 잡고 영향을 준다. 건축은 나에게 한 편의 소설을 쓰는 것과 같고 예술은 시를 쓰는 것 같다. 기념비는 이 둘을 합친 하이브리드다.“ 작은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그는 한 번에 하나의 프로젝트만 한다. ”그래야 남는 시간에 예술을 할 수 있으니까“(웃음) 도예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는 ”큰 규모의 건축도 결국 작은 습작에 기반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3D(차원) 스캐너와 프린터, AI(인공지능)가 창작하는 시대에도 이 거장은 두 손으로 찰흙을 주물러 형태를 만든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작업들은 애써 크게 소리치지 않아도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나간다. 스며들어 젖게 하는 가랑비처럼, 그의 예술은 인간의 행동을 바꿀 수 있으리라. 전시는 3월 11일까지.

이한빛 기자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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