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남달랐던 2인자의 쓴소리…"권력은 오만한 겁니다"

윤춘호(논설위원) 2023. 2. 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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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에서 만난 이재오


이 사람이 남달랐던 2인자인 이유

사실 이 사람이 정권의 2인자였을 때 모습은 그저 그랬다. 범접할 수 없는 권력자의 위세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전형적인 2인자의 모습 그 이상은 아니었다. 칼자루를 쥐었을 때 그 칼을 칼집에 담아두지 않았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 학살'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 공천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 이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적어도 여의도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대선 승리 1등 공신이라는 말을 들으며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총선에서 떨어진 것은 이 사람의 오만을 민심이 알아봤기 때문이다.

권력이 사라진 이후 이 사람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2인자라고 불리던 사람 중에 그 정권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하는 사람은 드물다. 정권이 끝난 이후까지 책임지겠다는 자세를 보인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정권이 어려운 지경에 빠지면 '나는 2인자 아니었다, 나는 허세에 불과했고 진짜 실세는 따로 있다'고 말하기 바쁜 게 세상인심이다. 이 사람은 달랐다. 교도소에 가지 않은 정권 2인자였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부차적인 것이다.

'권력자'가 아니라 '권력'에 대해 한결같은 충성을 보여온 사람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야말로 권력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권력을 누려도 봤고 권력과 싸워도 봤고 권력에 짓밟혀 보기도 했다. 권력을 만들었고 그 권력이 무너지는 과정도 지켜봤다.

권력의 무상함을 알지만, 권력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지도 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였고 변절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적장의 가랑이 사이도 기었을 사람이고 그렇게 해도 비굴해 보이지 않을 사람이다. 2천 년대 초반 야당 원내 사령탑이던 이 사람을 볼 때면 사나운 맹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 특유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의원 총회나 국회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할 때면 포효한다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 싶었다. 온몸으로 표시하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에 골수 운동권에서 보수 정당에 입당한 전력이 더해져서 권력욕의 화신처럼 보였다.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현 정부의 행태를 보면서 새삼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현 정부의 권력 실세들에 대해 "설쳐댄다" "조폭 똘마니" 같다는 말을 날리고 최고 권력자에 대해서도 오만하다고 일갈하는 이 사람에게 권력이 무엇인지, 권력을 잡은 이들의 심리를 듣고 싶었다. 5선 국회의원에 MB 정부의 넘버 2로 불렸던 이재오를 만난 이유다.
 

다섯 번 구속된 '골수 운동권'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인생의 꽃 같은 시절 중 80개월이 넘는 세월을 감방에 갇혀 지냈다. 햇수로 치면 11년이다. 유신과 5공 독재 정권은 물론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감방에서 열 달을 보내 모두 5번 교도소 신세를 졌다.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반공법 같은 것들이 이 사람을 감옥에 가뒀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긴 정치인이고 중앙정보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누구에 못지않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이부영, 김근태, 장기표와 함께 재야 4인방이라 불리던 '골수 운동권'이었다.

박정희와 싸우고 전두환, 노태우와 싸우고 김대중과 싸우고 노무현과 싸웠다. 박근혜와는 같은 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어떤 정적들보다 더 치열하게 싸웠다. 이들은 정적, 말 그대로 적이었고 이들과의 싸움은 베지 않으면 베이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삶은 늘 치열하고 절박했다. 밖으로는 독재자와 싸웠고 안에서는 동지들과 싸웠다. 누구보다 적과 아군의 구분이 명확했고 중재자나 심판 같은 역할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1987년 양김 단일화 논쟁, 1989년 재야 정치권 진입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 사람이 입장을 정하면 피아가 분명해졌고 논점이 선명해졌지만 대립도 격렬해졌다. 1987년 대선 후보 단일화 논쟁을 회고할 때는 영락없이 재야 투사 이재오였다. 이미 30년도 훌쩍 지난 이야기였는데 기억은 선명했고 표현은 날카로웠다.

반독재 민주화 시절 이 사람과 이 사람 가족이 겪은 가난과 고통은 지금 들어도 가슴 아린 이야기다. 아내와 경주에서 며칠 간의 신혼여행을 보낸 뒤 아내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고 자신은 검거의 손길을 피해 전국을 떠돌며 도망자 신세로 살았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신혼이었다. 작은 옷 가게를 하며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온 아내에게 평생 월급봉투 제대로 갖다 준 적이 없다. 이 사람이 다섯 번이나 감옥에 들락거릴 때 아내는 옥바라지를 하며 아이 셋을 키우고 치매를 앓는 장인을 17년 넘게 돌보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딸이 태어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아이들은 정보과 형사들을 아버지의 친구로 알고 자랐다. 그런 아이들에게 감옥에서 편지를 쓸 때 아빠가 감옥이나 교도소에 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병원', '대학'에 있다고 했다.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해서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고 <깃발>이란 소설을 쓴 적도 있다. 등단 절차를 밟지 않았을 뿐 문인이라고 해도 시비 걸 사람 별로 없다. 글 쓰면서 국어 교사로 살아도 어울렸을 사람답게 이 사람이 쓴 책들은 글 읽는 맛이 있다. 1983년 감옥에서 네 번째로 풀려났을 때 38살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치매를 앓는 장인과 딸아이 둘, 그리고 9평 집이 전부였다. 집 절반은 가게로, 나머지 절반을 아이와 장인이 나눠 쓰고 있었다. 감옥에서 나왔지만 마땅히 자기 몸 하나 누일 공간이 없는 신세가 기가 막혔다. 마침 집 주변에 재야 활동을 함께 한 나병식이 경영하는 풀빛 출판사가 있었고 거기에서 독서실도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독서실 한 칸을 빌어 거기에서 기거하며 <해방 후 한국 학생운동사>를 썼다. 그 책에서 나온 인세는 가족들의 생계에도 꽤 도움을 줬고 평가도 좋았다. 그때 처지가 절박했기 때문에 글이 잘 나온 것 같다며 그 책을 대만국립대학에서 교재로 썼다고 자랑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길은 어떤 면에서 강요된 선택이었다. 경북 영양 산골에서 태어나 가난을 친구 삼아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군청 말단 직원으로 특채되었지만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골방에 틀어 앉아 석 달 동안 참고서를 줄줄 외워서 중앙대학에 들어갔다. 입학하자마자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앞장섰다가 제적됐다. 군대에 끌려가서 36개월을 보낸 뒤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거부당했다.

그때의 분노가 민주화 투쟁의 원동력이다. 타고난 다혈질 성격과 정의감 거기에 우직한 촌놈 근성도 한몫했다. 1970년대 국어 교사로 살았던 짧은 몇 년이 가장 행복했고 교사가 자신에게 잘 맞는 옷이라는 말도 했지만 이 사람 몸 안에는 정치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농촌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을 꾼 것도, 중고등학교 시절 4H 운동을 한 것도, 경북 영양 그 시골에서 웅변을 익히고 대학에 들어와서 곧바로 학생 운동에 투신한 것도 정치인의 DNA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다섯 번 당선된 보수 정치인


국회의원 배지가 곧 권력이다. 1990년 민중당을 만들어 제도권 정치에 들어선 것은 그 권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우재, 장기표, 김문수 등 재야 출신의 나름 쟁쟁한 인물들이 당의 얼굴로 포진하고 있었고 노회찬, 김성식, 김용태 같은 훗날 한국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신진기예들이 허리 역할을 했다. 당의 사무총장으로 민중당 창당을 주도했지만 역부족을 실감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4대 선거에서 야심차게 도전하였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당선자와 2만 표 차이로 낙선했고 민중당은 전체 득표의 1.5%를 얻는 데 그쳐 당이 해산되었다.
 
"민중당으로 선거에서 이긴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손으로 만져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전멸이었다."
<함박웃음> 중

권력의 불의와 부정을 외친다고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감옥을 몇 번 가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하늘의 별'을 따기 위해 1996년 1월,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그때 일을 말할 때 변절이라는 말을 애써 안 쓰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불가피하게 그 말을 써야 할 때도 변신, 변화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해 서울 은평을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같은 지역구에서 5선 의원 경력을 쌓았다. 이 사람의 지역구 관리는 유명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이면 자전거를 타고 호남 출신 유권자가 40%에 이르는 지역구를 돌았다. 경상도 출신은 안되고, 여당은 안된다는 전통이 있는 이 지역구에서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

"불광시장 재래시장 있잖아요. 거기 가면 노점상 하는 아줌마도 있고 할머니도 있는데 처음에는 뭐 냉담했지 뭐. 근데 이제 하도 정성으로 내가 인사를 하고 다니니까 사과 박스 있잖아요. 거기에다가 '대통령 김대중, 국회의원 이재오' 써가지고 장바구니 옆에 딱 놓고 있어요. 내가 눈물이 나지. 너무너무 고맙지. 남들 보는데 이걸 왜 써놨어요? 라고 물었더니 자식 얼굴도 일 년에 한두 번 보기 어려운데 국회의원이 맨날 찾아주니 고마워서 그런다는 거야."

여의도에 들어온 뒤에도 가장 치열한 싸움꾼이었다. 특히 '김대중 저격수'로 불리며 DJ 정권과 각을 세웠다. 부자들의 정당 같았던 당시 한나라당을 싸우는 야당으로 변신시킨 것은 이 사람 공이 크다. 홍준표, 김문수, 김홍신, 정형근 같은 전투력이 좋은 대여 공격수들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도 이 사람은 눈에 띄었다. 두 차례 원내 사령탑을 지내면서 당시 여당에 대한 공세를 주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의 부패 스캔들을 집중적으로 제기한 것도,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불신임 결의안을 통과시켜 이른바 DJP 연대를 무너트린 것도 이 사람이다. 아는 사람이 더한다는 말도 들었고 보수정당에 들어간 것보다 보수정당에 들어간 이후 모습이 더 역겹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고 자리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이런 소감을 밝혔다.
"이제 내 인생에서 남에게 손가락질받을 일, 정치적으로 남이 못 할 말을 대신해 욕을 먹는 일은 끝났다. 가슴 속에 맺혀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함박웃음> 중

제도권 정치인으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서 남이 못한 말을 대신하기도 했다는 속내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하기 싫은 말은 하지 않는 것, 자신의 본심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한 모양이다.

5선 국회의원 당선이 다섯 번의 구속에 대한 보상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민주화 운동은 민주화 운동이고 보수 정치인의 삶은 별개라는 것이다.

"내가 10여 년 옥살이하고 7년을 수배당해서 도망을 다니고 했는데 그때 삶을 앗아간 것에 대해서 그 보상은 영원히 안 되는 거지. 그다음에 국회의원 5선 하고 정권 잡고 이런 거는 내가 정당에서 노력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젊었을 때 고문 당한 것을 5선 해서 보상받았다 뭐 그런 차원이 아니고 그건 그거대로 한 청춘을 소모한 거고, 그거는 독재로부터 한 청춘을 앗아간 거고 또 정치하면서 그냥 놀면서 5선 된 게 아니잖아요. 내 전부를 바쳤어. 정치에 전부를 바쳤잖아요."

2012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중간에 뜻을 접었다. 이미 차기 보수 정당 대선 후보는 박근혜로 굳어진 상태에서 별 의미 없는 도전이었다. 2016년에는 늘푸른한국당을 만들어서 다시 한번 대권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초라했고 사실상 그것으로 정치 인생은 막을 내렸다.
 

MB와의 인연


이 사람이 없었다면 MB의 인생은 훨씬 더 초라했을 것이다. MB는 이해관계에 밝은 기업인 출신이고 이 사람은 거리의 투사 출신이니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1964년 한일 회담 반대 투쟁 때부터 서로 알기는 했지만 학교도 다르고 나이 차도 있어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1996년 국회에서 한반도 대운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명박을 보고 이런 사람이야말로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했단다. 반독재 민주화만 외치던 사람에게 MB의 실질적이고 성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보수정당 주류에 끼기 어려웠던 두 야심가의 결합은 MB의 서울시장과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MB 옆에 서 있었고 거의 모든 사람이 전직 대통령의 탐욕을 질타할 때도 이 사람은 열정적인 목소리로 MB를 변호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 해서 모은 돈으로 전직 대통령 석방을 요구하는 신문 광고를 몇 차례나 냈다. 끈 떨어지면 언제 알던 사람이냐고 등 돌리는 게 다반사이고 혹시 자기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겁부터 내는 게 인지상정인데 우직하게 MB를 옹호했다. MB가 지난해 말 사면된 이후 가족 아닌 사람들 만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지만 자신은 예외라고 했다. 인간적인 정리에 못지않게 그 정권이 자신의 정권이기도 하다는 생각, 정권의 시작과 끝은 물론 그 이후까지도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였다.


- 그런데 MB 외로울 때 왜 옆에 계셨어요. 의리 같은 건가요.

"어쨌든 내가 MB 하고 같이 해서 정권 만들고 청계천 복원하고 4대강을 했는데 정치적으로 일을 같이하려고 마음먹었으면 그 사람의 끝도 같이 지켜봐야지. 좋은 시절만 같이 하고 끝났다고 해서 떨어지고 그거 하는 거는 정치인 자세가 아니다... 내가 MB 옆에 있어 손해 보는 한이 있어도 내가 같이 있어야지."

- 손해 본다는 생각은 하셨죠.

"주변 모든 사람들이 다 나한테 하는 이야기가 너 MB 때문에 신세 망친다고 맨날 그랬지. 그래도 10년 만에 MB와 함께 정권 되찾았는데 그 사람이 뭐 여러 가지 개인 문제로 감옥에 가고 어렵다고 그래서 내가 떠나면, 내가 무슨 권력을 보고 MB를 (대통령) 시킨 것처럼 되잖아요. 그게 아닌데… 그래도 뭐 내가 그래도 MB를 대통령 시킨 것이 죄라면 그 죄로 MB를 지켜야 되는 것 아니냐…"

누구도 우러러보는 기색이 없었다. 적지 않은 기록을 봤지만 누구를 지도자로 모시거나 누구를 추종하거나 충성을 다짐했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명박의 장점을 높이 평가하고 각별한 마음을 아끼지 않았지만 동지로서 대하는 것이지 주군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DJ에 대해서도 민주화 운동의 대등한 동지 정도로 생각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고마운 사람은 많지만 추앙하는 사람의 이름은 듣기 어려웠다.

- 제일 존경하는 분이 누굽니까 그런 얘기를 어디 안 써놓으셨더라고요.

"별로 내가 뭐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뭐 이거 별로 생각 안 해봤지…70년대 1세대 인권 변호사분들에게 신세 많이 졌고 김상현, 최형우 이런 선배들도 참 고맙지요."

이명박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정권이기도 했던 MB 정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MB를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아닌 '권력'에 충성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은 'MB 대통령 만들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앞 부분은 누구나 동의할 말이지만 뒷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 많다.

- 대단히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셨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재야하다가 야당 10년 하다가 여당 10년 했잖아요. 재야에 있을 때는 반독재 투쟁에 몸을 바쳤고. 국회의원 돼 갖고는 또 야당을 10년 하면서 반여당 투쟁을 해왔으니까 그게 다 권력과 관계되는 거잖아…그러니까 내가 10년 야당과 싸울 때만 본 사람들은 저 이재오 진짜 권력욕이 대단하다 볼 수 있는데 권력욕이 대단하다는 게 맞으려면 정권을 우리가 잡았을 때 그 정권을 갖고 내가 뭘 진짜 장기 집권을 하려고 했든지 아니면 내 개인이 무슨 부를 누렸든지 뭐 했어야 되잖아요. 내 양심을 돌이켜봐도 내가 권력의 자리에 있어서 권력으로 인해서 내가 부끄러운 일을 한 거, 나 별로 없어요."

이 사람에게 권력이 추상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구체적인 현실이자 힘이었다. 권력이란 자신을 학교에서 제적하고 고문하고 교도소에 가두는 힘이었다. 그 힘에 억눌려 늘 누군가의 감시를 의식하며 쫓기고 숨어 살아야 했다. 입장이 바뀌었을 때 권력은 공천이나 공직에서 누군가를 배제하는 힘이었고 이전 정권의 최고 권력자를 삶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것이기도 했다. 시내 한복판의 고가도로를 뜯어내고 보이지 않던 개울을 드러내는 힘이자 나라의 산과 강을 뒤집어엎는 힘이었다. 그런 힘을 잃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2008년 총선에서 불의의 일격을 맞아 낙선했을 때 이 사람 집에서는 새벽마다 통곡 소리가 들렸다.

- 그 이야기 맞습니까. 2008년에 낙선하셨을 때는 새벽마다 그냥 거의 통곡을 하셨다라고 하는 기사가 있던데요.

"새벽마다 통곡한 건 아니고 하여튼 아침에 일어나면 눈물이 많이 났지. 왜냐 나는 정말 내 전부를 바쳤는데 무슨 비리에 하나 연루된 게 없고, 정말 국회 끝나면 집에 가서 살고 자전거 하나 갖고 골목골목 다니면서 누구 집 애가 장가가는지 시집가는지까지도 다 알 정도로 누비고 다녔거든. 지역 일도 많이 했거든. 뉴타운도 가져오고. 그랬는데 내가 떨어졌잖아요. 내가 한 것에 비해서 내가 떨어졌다 하는 것이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상당 기간 헤어 나오지 못한 점이 있어요."

선거에서 지는 것은 울음으로밖에 표시할 수 없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물리적인 고통 그 자체였다. 권력을 잃는 것은 생살을 뜯어내는 고통이었다.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

인터뷰를 하던 날 아내와 다퉜다고 했다. 지금도 5만 원, 10만 원 때문에 아내와 다툰다고 했다. 2016년 재산 신고를 11억 원 했으니 서민 기준으로 보면 가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5선 의원에 장관급 자리를 두 번이나 거친 사람치고는 많다고 하기도 어렵다.


- 지금도 싸우세요?

"뭐 지금도 말다툼하지."

- 돈 때문에요?

"돈 아니면 우리가 다툼할 게 없어."

- 이 책 <함박웃음>에 보면 부인을 아주 훌륭한 여성으로 그려 놓으셨는데요.

"그때는 그랬지(웃음). 요즘은 집사람도 나이가 일흔다섯이잖아. 자기도 늙어가는데 뭐 갑갑하잖아. 맨날 푼돈 걱정해야 되고.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맨날 이럴 줄 알았으면 국회의원 5선 할 때 돈이나 좀 많이 모아놓지… 오늘도 딸내미 어디 가는데 돈 20만 있어야 되는데 그거 없다고 그러고…."

정치인에게 돈을 써야 할 일은 넘쳐나고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돈의 유혹은 다반사다. 팔순을 눈앞에 둔 나이에도 당당하게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그런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이 사람 집은 생존 정치인의 집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집이다. 지어진 지 50년이 넘은 23평짜리 집은 이 사람이 살아온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이 이 집에 다녀가면서 이재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겠다고 한 이야기는 꽤 알려진 일화다.

"유혹이야 좀 많았겠어. 내가 23평짜리 단독주택 지금도 옛날 그 집에 살잖아요. 집을 지어주겠다, 이거를 개발해 주겠다 뭐 온갖 사람들이 다 있었지. 그 말대로 다 들었으면 내가 아파트 아마 열 채도 더 샀을 거야."

카메라 한 대 사달라는 아이에게 아빠는 그런 것 사줄 능력 없다고 말했고 마땅한 일자리 잡지 못해 고민하는 딸에게 아빠 힘 빌려 어떻게 해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골프도 하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2009년 미국 연수 가기 전까지 운전면허도 없었다. 나이 예순이 돼서 아이들이 출가하고 나서야 자기 방이 생겼다. 치매를 앓는 장인과 세 자녀와 함께 살았으니 자기 방을 갖는 것은 욕심이었단다.
 

"'쇼'를 해도 이재오가 하면 다르다."


요즘이 현역 의원 시절보다 바쁘다. 많을 때는 하루에도 다섯 번 방송을 한다니 제2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사람 출연한 프로그램 조회 수가 적을 때는 150만, 많을 때는 200만이 넘는다.

- 댓글을 보니 반응이 뜨겁더군요. 스스로도 즐기시는 거 같고요.

"나도 즐겁게 하고 있어요. 여전히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칭찬하는 사람들도 늘었고. 우선 좀 재미있고 부담 없이 이야기하니까. 내가 뭐 하고 싶다든지 뭘 또 해야 되겠다든지 그런 욕심을 갖고 있으면 말도 이게 꼬여요. 또 말도 다듬어서 하게 되고, 또 이 말도 계산해서 하게 되고 그런데 우리는 그야말로 자연인이니까 다듬을 필요도 계산할 필요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니까."

이제는 물러설 줄 알고 놓을 줄도 안다. 굳이 이기려 들지 않는다. 젊은 진행자들의 다소 무례한 질문, 조롱으로 느껴질 법한 이야기에도 화내는 법이 없고 오히려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나이 듦이 주는 선물 같기도 하고 처한 입장이 달라졌으니 그에 충실한 것도 같다. 박지원, 유인태, 이상민 등 정치권 원로들과 같이 나오는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수시로 폭소가 터진다. 정치가 이렇게 재미있는 소재라는 것, 낯 붉히지 않고 인상 쓰지 않고 서로 웃으면서도 자기 말을 다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호통칠 때는 호통치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후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점심시간 포함해 4시간 넘게 이야기하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나이 듦이 주는 힘,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선거에 나갈 것도 아니고 돈 벌어 부자가 될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자리 부탁하고 공천 부탁할 것도 없으니 아쉬운 소리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는 거다. 인터뷰가 끝난 뒤 사진 몇 장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인터넷에서 찾아 쓰라고 했다. 나는 아쉬울 것 없으니 사진이 필요하면 당신들이 구해서 쓰라는 태도였다.

연극을 했기 때문일까, 이 사람 몸짓에서는 연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어떻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지,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잘 들릴지 아는 사람이다. 그런 것은 타고난 재능이기도 하지만 웅변과 연극, 교사로서 경험이 더해진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자전거를 타고 5천 원짜리 식사를 하면서 현장을 누빌 때나 특임장관 시절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 쇼를 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쇼를 해도 이재오가 하면 다르다'는 말을 들었다. 2010년 보궐 선거에서 당의 지원을 일체 거부하고 단기필마로 지역구를 누비는 기발한 선거운동을 할 때도 사람들은 쇼라고 했지만 유권자들은 그 쇼에 감동했고 표를 줬다. 재야 시절까지 포함하면 50년 넘는 세월을 정치판에서 보낸 사람이니 이 사람 안에 능구렁이 몇 마리는 들었다고 봐야 한다.

지금도 이재오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가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 하나 부패하지 않고 감옥 가지 않았다고 해서 땅에 떨어졌던 MB정부의 도덕성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말할 자격이 있고 이런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자기 같은 사람까지도 입을 다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쓴소리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사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이태원 참사, UAE 방문 중 나온 이란 주적 발언 등을 예로 들었다. 야당과의 협치를 강조하면서 나온 말이 권력의 오만이었다.


"현 정부 들어선 지 벌써 10달이 다 돼 가는데 대통령이 야당의 대표나 야당의 원내대표단이나 야당의 상임위원장단이나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잖아요. 한 번도 야당을 방문해 본 적이 없잖아요. 사적으로도 야당 지도부들하고 술 한 잔 한 적 없잖아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말로만 민생에 여야가 없다, 야당 협조해야 된다 이런 말을 백 번 하면 뭐 하냐 이거예요. 야당이 안 들어주는데. 이거는 권력의 오만입니다."

- 대통령이 참모들의 이야기를 안 듣는다,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직언할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자기 말만 하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 안 듣는다고 하던데 그런데 역대 대통령이 다 자기 말을 많이 하죠. 누구든지 대통령이 되면 세상 다 손바닥만 하게 보이고 모든 게 자기 말 한마디로 그냥 움직이니까 그야말로 땅 위에 살다가 하늘 위에 올라간 그런 기분이죠. 대통령이 되면 그러니까 천상에서 천하를 내다보는 그런 기분이지. 초기에 몇 달은 그런 기분 갖는 건 좋지만 그게 오래 가면 안됩니다…대통령도 성인이 아니니까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할 수 있지만 그런 게 너무 오래 가면 안됩니다. 임기가 5년이잖아요. 5년 해보고 다음에 잘하지, 1년 해보고 그다음에 잘하지 이런 게 아니잖아요."

자신의 경험을 들어가며 권력자의 오만에 대해 이야기했다. 권력은 오만해질 수밖에 없고 자기 역시 그리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독재 정권과 싸우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 싸우다가 이제 여당이 돼서 권력을 잡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야당 때, 재야에 있을 때 그 어떤 피해의식이나 내가 못 했던 거 이런 거 이제 내가 권력 잡았으니까 내가 생각했던 거 한번 해보자 그런 생각이 들 것 아닙니까. 그럼 자연적으로 권력이 오만할 수밖에 없어요. 권력에 취할 수밖에 없어요. 권력이 자기가 힘을 가지면 힘을 가졌을 때 이 힘을 내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 쓸 것이 아니고 정말 이걸 서민을 위해서 국민들에게 써야 되겠다 이 생각을 가져야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오만하게 돼 있어요."

- 대표님도 그러셨습니까.

"나도 그 예외가 아니었을 수 있어. 나는 재야를 거쳤기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그러지는 않지만 그러나 무의식 중에 내 속에 그런 권력 오만이 있을 수도 있죠.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아주 엄혹한 시절의 재야를 거쳤기 때문에 도덕성이라든지 이런 것이 몸에 뱄기 때문에 부패라든지 부정이라든지 비리라든지 이런 데는 근처도 안 갔지 그래도."

- 권력이라는 게 뭔가요. 너무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그게 참 쉽고도 어려운 질문인데 권력은 도구예요. 칼 쓰는 사람은 칼이 권력이고 밭 매는 사람은 호미가 권력이지. 정치인들에게는 권력이 도구인데 이게 좋은 말로 말하면 국가와 국민을 살리는 도구지. 권력은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권력을 개인이 사유해 가지고 사고 나잖아요. 맨날 감옥 가고 뭐 하는 게 다 그런 거잖아요. 권력이 도구라는 걸 모르고 권력을 내가 누려야 하는 어떤 힘으로 생각하니까 감옥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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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호(논설위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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