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진아”…K-콘텐츠가 아로새긴 복수의 이름들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2023. 2. 6.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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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더 글로리’ 인기…세계인들에 학교폭력 교육 등 ‘생각할 거리’ 던져줘
넷플릭스의 드라마 '더 글로리' 포스터



“난 오늘도 출근했어, 연진아.” “난 오늘 세차를 했는데 눈이 내렸어, 연진아.”

새해 들어 가장 많이 언급된 밈(meme : 온라인 유행어)을 꼽자면 ‘연진아’일 것 같다. 연진은 지난해 12월 공개된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 ‘더 글로리’에 나온 이름이다. 주인공인 동은(송혜교 분)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힌 연진(임지연 분)을 향해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연진에게 편지를 쓰거나 독백을 할 때 이름을 부르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때의 동은의 말투를 따라하며 “OO했어, 연진아”라는 식의 패러디를 하고 있다.

특정 명사나 동사도 아니고 사람 이름 자체가 밈이 된 것은 이례적이다. 게다가 주인공의 이름도 아닌 학교 폭력 가해자의 이름이 패러디를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더 글로리’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만큼 더욱 궁금해진다. 각국에 있을 수많은 학폭 가해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연진처럼 누군가가 평생 곱씹으며 불행을 빌 만한 이름이자 상처로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긴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회적 메시지 전하는 ‘글로벌 스피커’

K-콘텐츠의 사회적 파급력이 커지고 있다. ‘더 글로리’, ‘지금 우리 학교는’, ‘D.P.’, ‘약한 영웅’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한 문제들을 다룬 작품들이 잇달아 나오며 생긴 현상이다. 이 가운데 다수 작품은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가장 최신작인 ‘더 글로리’는 넷플릭스 드라마 부문 글로벌 4위를 기록했다.

더욱 긍정적인 점은 단순히 인기를 얻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외 현지에서 해당 작품들을 통해 사회 문제를 조명하고 각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콘텐츠가 재미 또는 감동, 이를 뛰어넘는 다양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K-콘텐츠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담아 전하고 확산시키는 ‘글로벌 스피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해당 콘텐츠들의 특성은 제각각이다. 장르로 본다면 학교물·좀비물 등으로 나눠지고 세부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하나의 유사한 맥락이 있다. 그 맥락은 외신에서 만든 ‘K-복수극(K-Drama Revenge)’이란 용어로 통칭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 매체 포브스는 ‘더 글로리’를 “상처 입은 송혜교가 이끄는 K-복수극”이라고 소개했다. 복수극임에도 복수라는 목표와 행위에만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것도 매력으로 꼽았다. 서사도, 분위기도, 캐릭터도 그 방향과 깊이를 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다채롭다는 것이다. 포브스는 “공포에서 멜로로, 또 살인 미스터리로 예고도 없이 스토리의 방향을 틀어버리는 매력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전에도 복수를 다룬 한국 작품들은 꽤 많았다. 한국 최초의 영화인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1919년)’는 의붓어머니에게 핍박받던 주인공 송산이 복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주 오래전 작품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중의 뇌리에 깊이 남은 복수극이 많다. ‘복수 3부작’으로 불렸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2002년)’, ‘올드보이(2003년)’, ‘친절한 금자씨(2005년)’는 매혹적인 미장센과 강렬한 반전으로 관객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눈 밑에 점을 찍고 돌아와 복수한다는 설정의 드라마 ‘아내의 유혹(2008년)’은 자극적인 소재에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과거 복수극들엔 일부 한계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권선징악’을 바탕에 두긴 했지만 주로 치정이나 가족사에 국한됐다.

최근의 K-콘텐츠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영화 ‘기생충(2009년)’은 전 세계에 만연한 빈부 격차와 그로 인한 파국을 그려 국내외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더 글로리’와 ‘D.P.’등은 학교 폭력부터 가정 폭력, 군대 내 폭력까지 사회 곳곳에 만연한 폭력 문제로 뻗어 나간다. 여기엔 ‘기생충’에서 다뤄진 빈부 격차 문제도 함께 연결된다. ‘더 글로리’의 동은처럼 피해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아예 낼 수 없거나 내더라도 곧 묵살되고 마는 힘없고 가난한 약자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해자들은 그 약점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비열하게 피해자를 공격한다.

이 같은 K-콘텐츠의 새로운 영향력엔 긍정적인 점이 많다. 특히 기존 공권력과 제도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파고들어 수면 위로 지속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금까지 학교나 군대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사고들은 해당 장소와 조직의 문제로만 한정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해자 중 유명인에 대해선 학폭 문제를 고발하거나 ‘미투’, ‘빚투’ 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대중의 기억 속에서 금방 잊혔다. 그보다 더 나아가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는 조직의 잘못된 문화, 이를 방관하는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고민과 개선 노력은 부족했다.

한편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왜 이렇게 학폭 드라마가 많은가”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폭력 문제가 소재로 자주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패러디로 인해 오히려 피해자들의 상처가 깊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대한 이런 점들을 고려해 적정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해외에서도 학폭 고발…K-콘텐츠의 새로운 영향력

해외에서도 K-콘텐츠에 따른 각성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태국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선 ‘타이 더 글로리(Thai The Glory)’란 해시태그를 단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더 글로리’ 방영 이후 학폭 문제가 새롭게 조명되며 피해 사실을 털어놓고 고발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태국 배우 파왓 칫사왕디는 “평생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가겠다”며 학폭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K-콘텐츠의 사회적 영향력이 더욱 크게 부각된 것은 미국과 유럽 등 기존의 해외 콘텐츠와는 차별화된 점 덕분이다. 해외 작품 중에서도 사회 문제를 다룬 것은 많았다. 하지만 인종 차별, 노예 제도, 마약 범죄 등 거대 담론이나 문제와 연결된 것이 많았다. 학교나 군대처럼 매일 봐야 하는 사람들, 매일 활동해야 하는 조직 안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K-콘텐츠는 그 틈을 파고들어 많은 사람들이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일상의 문제들을 다뤘다.

그 범위는 비단 폭력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1월 14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일타 스캔들’은 유명 스타 수학 강사와 반찬가게 사장의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다. 그런데 로맨스에 학벌지상주의와 그에 따른 악화되고 있는 사교육 문제를 결합했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에서 반찬가게를 하는 남행선 사장(전도연 분)은 이렇게 말한다. “고진감래를 믿으며 고삐를 늦출 새 없이 고생길을 달려 고소득·고학력·고득점·고위층을 향해 고고하는 나라.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주소 아닌가.”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와 닿을 이야기다. 그 덕분에 이 작품 또한 해외에서도 공감을 받고 있다. 베트남·대만·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에선 넷플릭스 드라마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콘텐츠뿐만 아니라 K팝과 아티스트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지난해 미국 백악관의 초청을 받아 조 바이든 대통령과 아시아계 증오 범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방탄소년단은 2018년부터 유엔 연설을 통해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력을 꾸준히 발휘하고 있다. 2021년엔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힘들고 지친 전 세계 젊은이들을 응원했다. 이들은 “우리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아니라 ‘웰컴 제너레이션’”이라며 “차근차근 노력하면서 해결하고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라고 말했다.

드라마나 영화 한 작품이, 노래 한 곡이 이 세상과 사회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개개인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연진과 같은 가해자가 드라마를 보며 자신도 언젠가 그 이름이 불릴지 긴장하고 과거를 다시 돌이켜 보는 것, 잠재적 가해자들이 하려던 행동을 하지 않고 멈추는 것처럼 말이다. 법과 제도가 다 해내지 못한 것을 K-콘텐츠가 조금씩 이뤄 나간다면 그 존재 이유와 가치는 더욱 높아지지 않을까.

김희경 한국경제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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