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처연함을 안다면, 당신은 ‘메모리’를 기억할 것이다
서사가 무엇보다 중요한 뮤지컬에서 특별한 줄거리도 없는 <캣츠>는 1981년 초연 이래 세계 곳곳에서 7550만명이나 관람한 인기 작품으로 거듭났다. 이유는 무엇일까? 뮤지컬의 주인공 격인 그리자벨라와 그가 부르는 ‘메모리’가 있어 가능했다.
뮤지컬 <캣츠>는 영국 시인 티 에스 엘리엇의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가 원작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이 시를 읽어준 기억이 있던 한 작곡가가 이를 바탕으로 뮤지컬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바로 <오페라의 유령>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등을 제작한 앤드루 로이드 웨버였다.
하지만 뮤지컬은 생각만큼 진척되지 않았다. 엘리엇의 책은 서사가 있는 소설이 아니라 연작시였다. 두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을 스토리 없이 춤과 노래만으로 채우는 건 너무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1980년 여름 영국 런던 근처에서 열린 시드먼턴 축제에서 로이드 웨버는 운명과 같은 사람을 만난다. 엘리엇의 아내 밸러리였다. 밸러리는 로이드 웨버에게 고양이 캐릭터인 그리자벨라를 알려주었다. 밸러리는 “그리자벨라가 아이들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출판사가 삭제해 원작 시집에 실리지 않았다”는 얘기를 전해준다. 그리자벨라는 한때 화려한 고양이였으나 바깥세상으로 떠났다가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 젤리클 부족에게 외면받는 캐릭터였다.
그리자벨라는 뮤지컬 <캣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토리와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캣츠>는 젤리클 부족 고양이들이 1년에 한번 만나 무도회를 열고, 여기서 선택받은 고양이가 천상으로 올라간다는 간단한 줄거리다. 로이드 웨버는 그리자벨라를 <성서>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와 같은 캐릭터로 살려 뮤지컬에 기독교적 전통의 ‘구원’의 메시지도 담았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와 같은 메시지다.
로이드 웨버는 이런 고민을 풀어준 그리자벨라에게 멋진 노래를 만들어 주었다. <캣츠> 하면 떠올리는 ‘메모리’다. 그리자벨라가 부르는 ‘메모리’는 처연하고 아름다우면서 인생을 담고 있다. 쓸쓸함과 외로움을 쏟아내지만 가슴 뛰게 하는 시작과 희망을 꿈꾸는 내용이다. 노래엔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한다. ‘메모리’의 클라이맥스는 “터치 미”로 시작하는 부분이다. 그리자벨라의 외로움을 드러내기에 관객은 이 부분을 들으며 인생의 아련함을 ‘터치’한다.
그리자벨라가 이 노래를 부를 때 처음엔 등을 돌리고 눈길을 주지 않는 동료 고양이들이 노래가 흐르면서 하나둘씩 그리자벨라를 쳐다본다. ‘메모리’에 위로받고 공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그리자벨라의 손을 잡고 보듬어준다. 그리자벨라는 1막 마지막과 2막 후반에 ‘메모리’를 애절하게 부른다.
지난달 20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막을 올린 <캣츠> 오리지널 내한공연에선 한국어로도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2막을 여는 초반에 호기심 많은 귀여운 고양이 제마이마는 한국어로 “밤하늘 달빛을 바라봐요. 아름다운 추억에 마음을 열어요. 그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새로운 날 올 거야”라며 ‘메모리’를 부른다. <캣츠>는 국외 공연을 할 때 항상 현지 언어로 ‘메모리’를 부른다. 한국 공연에서도 깜짝 놀랄 만한 한국어 실력을 뽐냈다.
‘메모리’는 뮤지컬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명곡 중 하나다. 1981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개막해 미국 브로드웨이에 연착륙한 뒤 지금까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세라 브라이트먼, 셀린 디옹을 비롯한 세계적인 가수가 180회 넘게 이 노래를 녹음했다.
<캣츠> 초연 공연에서 그리자벨라를 맡은 배우는 일레인 페이지였다. 이번 내한공연에선 조애나 암필이 맡았다. 암필은 “‘메모리’는 정말 훌륭한 아티스트들이 불렀던 곡이기 때문에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항상 부담이 크다. 굉장히 깊이가 있는 곡”이라고 했다.
국내에서 정식 라이선스 공연이 올라간 것은 2008년이었다. 치열한 오디션을 거친 뒤 그리자벨라는 옥주현과 신영숙이 맡아 탄탄한 실력으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이번 <캣츠>는 2017년 내한공연 뒤 5년 만에 젤리클석(1층 통로석)이 부활했다. 고양이로 변신한 배우들이 무대에서 객석으로 내려와 젤리클석에 앉은 관객과 눈을 맞추거나 장난을 걸기도 한다. 다음달 12일까지 만날 수 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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