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의 빛과 그림자] 5. 소양강댐과 신북읍

오세현 2023. 2. 6. 05: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농업→기술·공업→관광’ 댐 건설로 바뀐 신북읍 산업지도
공사 직전까지 인구 5000명 증가
근로자 거주로 ‘새마을’ 수면 위
농업 종사하던 주민 기술 학습
여력 없는 주민 공사 잡부 투입
북 공사법 유출 우려 보안 철저
닭갈비·막국수 맛집 당시 조성
준공 후 관광객·견학단 필수 코스
소양강댐 뼈대가 만들어졌다. 소양강댐 공사는 당시 국가 예산의 6분의 1이 투입될 정도의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사진제공=K-water

춘천시 신북읍은 소양강댐 건설 전후로 지역이 바뀌기 시작했다. 외지인의 유입이 늘었고 학교가 커졌다. 지금은 명물이 된 막국수·닭갈빗집 역시 이 당시 인부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면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신북읍 주민들에게 소양강댐 건설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이었다.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이 기술과 공업에 눈을 뜨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춘천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홍인표(68) 유포2리 이장은 “시골에 있던 사람들은 그동안 밭에 가서 농작물 심고 추수해 먹고사는 생각만 했었는데 중장비가 지나다니고 다리가 지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농사만 지어서는 안 된다.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젊은 사람들이 기술을 배우고 기술인력으로 배출되니 어떻게 보면 농사만 짓던 사람들의 시야가 넓어졌다”고 했다.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상황. 기술을 배울 여력이 없던 사람들은 잡부로 공사 현장에 투입됐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이어진 공사현장에는 수많은 외지인들이 드나들었다. 통계청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1960년 1만2384명이었던 신북 지역 인구는 공사 시작 직전인 1966년에 1만7378명으로 5000여 명 증가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신북읍 규모도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천전5리는 외지인들의 유입으로 생겨난 곳이다. 홍인표 이장은 “근로자들이 마을에 살고 있으니 리(里)가 하나 더 생길 수밖에 없었다”며 “소양강댐 때문에 물 속에 있는 마을은 없어졌지만, 바깥에는 새로운 마을이 생겨난 셈”이라고 했다.

당시 국가 건설 예산의 6분의 1이 투입된 소양강댐 건설은 건설 과정 자체가 보안과의 싸움이었다. 더욱이 소양강댐은 북한과 지척이다. 콘크리트댐을 사력댐으로 변경한 이유 중 하나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으니 당시 남북관계를 감안하면, 공사과정이 외부로 유출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정태섭 전 춘천시의장은 소양강댐 건설 당시 인근 검문소에서 군생활을 했다. 정 전 시의장의 주요 업무는 검문이었다. 정태섭 전 의장은 “보안 유지 때문에 북한에서 공사하는 모습을 찍어갈지 모르니 수상한 사람이 카메라를 갖고 주변을 서성이면 이를 단속해달라는 건설 직원들의 부탁을 받았다”며 “하루는 카메라로 공사 현장을 찍길래 ‘왜 찍냐’고 물어보니 ‘공사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그런다’고 답하더라. 그래서 못 찍게 하고 쫓아낸 적이 있었다. 북한에서 우리 기술을 배우려고 했을 수도 있고 만약에 누군가가 댐에 폭탄이라도 설치하면 큰 일 아니냐. 그때는 그런 시절”이라고 했다.

공사가 시작되면서 상천초 학생들은 단골 소풍장소를 잃게 됐다. 댐 건설 전만 하더라도 상천초는 해마다 청평사를 찾았다. 교통편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라 걸어갔다 걸어서 다시 와야 하는 일정이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는데, 댐 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청평사를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다. 홍 이장은 “소풍이라면 즐거워야 하는데 청평사로 간다고 하니 ‘어떻게 걷나’ 하는 생각에 즐겁지 않았다”며 “어린 마음에 다들 ‘청평사 안 가서 좋다’ 했던 기억이 난다”고 웃어보였다.

일자리가 생기니 너도나도 댐 건설 현장에 뛰어들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가계에 보탬이 되겠다고 도시락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10㎞를 걸어 출근했다. 1965년 공사 시작전부터 1973년 완공까지 그는 9년 간 소양강댐 공사에 참여한 이상익(81)씨도 “암반을 붙이려면 깨끗해야 하는데 여성들이 솔로 돌들을 다 닦아서 깨끗하게 하는 일들을 맡았다. 그 일을 하는 여성들만 2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일은 힘들어도 당시 일당 300원을 받을 수 있어 인기가 좋았다.

소양강댐 공사를 위해 장비가 늘어서 있다. ‘최대한의 가동, 딲고, 조이고’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사진제공=K-water

신북읍의 변화는 계속됐다. 춘천의 랜드마크가 된 신북읍 닭갈비·막국수거리 조성의 시작도 결국에는 소양강댐 건설이다. 현재도 성업 중인 샘밭막국수·명가막국수 등의 맛집들이 그때 만들어졌다. 샘밭막국수의 경우 댐 건설로 화전민들이 이전하던 1970년 문을 열었다. 공사가 한창이던 시절, 값싸고 맛있는 막국수 가게들은 금세 손님들을 사로잡았고 1973년, 소양강댐 준공 이후에는 관광객들과 견학단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됐다. 현재도 2군단 일원부터 소양강댐 정상까지 양쪽에 들어선 막국수·닭갈빗집만 어림잡아 20여 곳이 넘는다.

홍인표 이장은 “소양강댐이 준공된 시절에는 신북읍에 관광객이 갈 식당이 마땅치 않았다”며 “동양 최대 규모의 사력댐이니 각 지자체에서도 서로 보러 오겠다고 할 정도였는데 댐과 가까운 주변 막국수 가게들을 찾기 시작했고 또 가게들 솜씨가 좋으니 막국수 가게에 이어 닭갈비 가게까지 들어서게 됐다”고 했다. 오세현·정민엽·사진제공=K-water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