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시청률 0% 앵커’ 쿠마르의 싸움
“지금 인도의 뉴스는 뉴스가 아닙니다.”
인도 언론인 시상식에서 수상자로 호명된 NDTV 앵커 라비시 쿠마르는 단상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잔칫집에 찬물을 끼얹는 수상소감이었다. 이 말을 들은 동료 언론인들은 과연 뜨끔했을까. 그의 뒤를 이어 수상대에 오른 또 다른 방송사 앵커는 들으란 듯 외쳤다. “여러분, 시청률이 모든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은 2019년 총선을 앞두고 힌두민족주의가 모든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인도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쿠마르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청률 0% 앵커’로 불리는 쿠마르는 중요한 뉴스를 보도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뉴스가 지루하더라도 꼭 봐주세요.”
지독한 취업난 탓에 임용고시에서 1위를 하고도 4년 동안 희망고문만 당하다가 우울증으로 자살한 청년의 이야기 같은 것은 사람들이 봐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보도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실책을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시청률이 높은 다른 방송사들은 그런 소식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 패널들이 우르르 나와 소리를 지르며 싸운다. “그래서, 당신은 반민족주의자인가!” “무슬림이 우릴 죽일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그리고 아예 대놓고 말한다.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의 문제도 아닙니다. 모디입니다. 모디가 아니면 이 나라는 끝입니다.”
끈질기게 일자리와 빈곤 문제를 추적하며 모디 정부의 정책 부재를 비판하던 쿠마르는 결국 극우 세력의 표적이 된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살해 협박 전화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가난한 농촌 지역을 돌며 보도를 이어간다. 말라붙은 수도펌프 앞에서 빈곤층은 “물도 주지 않을 거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절규한다. 쿠마르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와 일자리 문제를 보도해달라고 애원한다. 쿠마르는 그들에게 묻는다. “국가 안보와 일자리 중 당신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농부들은 먹고살 것이 없으면서도 “국가가 우선”이라고 답한다. 쿠마르가 “(그런 판단을 위한) 정보를 어디서 얻느냐”고 다시 한 번 묻자, 농부들은 “뉴스”라고 말한다.
그해 열린 총선에서 모디가 압승을 거두리란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모디가 승리하자마자 NDTV 방송 사주가 잡혀갔다. 생계난에 처한 기자와 스태프들은 하나둘 살 길을 찾아 떠난다. 영화는 철거된 옛 사무실에 외롭게 서 있는 쿠마르를 비춰주며 끝이 난다.
쿠마르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영화 이후 벌어진 현실은 더욱 암담하다. 최근 인도 아다니 그룹 회장 가우탐 아다니는 NDTV에 대한 적대적 인수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미국 행동주의펀드 힌덴버그 리서치가 돈세탁, 회계부정, 주가조작 등 “기업 역사상 가장 큰 사기”를 저질렀다고 한 바로 그 아다니 그룹이다. 아다니 회장은 모디가 구자라트주 총리였던 시절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70억달러 수준이었던 그의 재산은 2014년 모디가 총리에 취임한 후 급격히 증식하기 시작해 아시아 3대 부호 수준까지 뛰어올랐다. 그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NDTV에는 비판할 용기보다 “정부가 옳은 일을 할때 옳다고 말해줄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쿠마르는 결국 지난해 11월 26년 동안 몸담아 왔던 NDTV에 사표를 냈다. 인도의 국민들은 정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방송사를 그렇게 잃었다.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하는 언론 자유 지수에서 인도는 지난해 전체 180개국 중 150위까지 떨어졌다. 이는 우간다나 짐바브웨보다도 낮은 순위다. 이변이 없는 한 인도는 올해도 계속 추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모디 총리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BBC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차단하기 위해 대학 캠퍼스 전체에 단전 조치까지 하는 등 더욱 거칠 것 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쿠마르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낮은 시청률로 고전하면서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는 시청률 0% 앵커라고 불리지만, 단 한 명이라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제 보도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국민은 숫자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2019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을 때 이런 수상소감을 남겼다. “저항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싸움은 꼭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전장에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싸웁니다.” 쿠마르는 NDTV를 나온 후 현재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채널 구독자 수는 벌써 400만명을 넘어섰다.
정유진 국제부장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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