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올해의 (그래도)

이정임 소설가 2023. 2. 6. 03:0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정임 소설가

엄마의 친구, 경애 아줌마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6시 내 고향’에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의 고향이 나와서 전화했다며, 안부를 물었다. 엄마의 안부를 대신 전하는 일은 참 어렵고도 쉽다. 환자의 상태를 복기하는 일은 괴롭고, 지난 통화 때 말했던 내용에 ‘더 나빠졌어요’만 붙이면 되니 쉽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물수건 등으로 몸을 닦으면 약해진 피부에 상처가 생기는, 엄마의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아줌마는 모두가 고생이 많다며 위로했고 그때마다 나는 “뭐, 우짜겠어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래, 엄마에게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겠는가. 발병을 막을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만, 과거로 돌아가도 원인을 모르고 완치가 안 되는 그 희소병은 막무가내로 엄마에게 돌진하겠지. 속수무책, 우리는 또 당하고야 말겠지. 나는 신이 아니라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겠냐’는 이 질문은 나를 향한, 체념을 담아 내뱉는 자조이기도 하다. 세상 온갖 슬픈 단어를 뒤섞은 문장이기도 하다.

말은 힘이 세다. 아줌마와 대화가 길어질수록 “우짜겠어요”라는 내 질문은 반복해서 나왔고 이 말이 거듭될수록 나는 정말 어쩌지 못하고 겨우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경애 아줌마가 통화를 끝낼 즈음 대뜸 그러는 거다. “그래그래, 우짜겠노. 어짤 수 있나. 상황이 안 좋아도 니는 참 긍정적이다. 좋다.”

전화를 끊고 한참이나 아줌마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어쩌겠어요’를 긍정의 말로 들을 수 있다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 속에서 살고 있는가.

‘우/짜/겠/어/요’ 이 다섯 음절을 여러 번 소리 내 보았다. 소리를 낼 때 음의 높낮이를 다르게 내보고 끝음절을 짧게 혹은 길게 소리 냈다. 신기하게도 문장은 다 다른 뜻으로 들렸다.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맥락상 생략되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상대방이 생략한 말을 찾아가며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러다 보면 오해가 생기기도 할 터다. 방금의 대화에서 ‘어쩌겠냐’는 내게 물음표가 붙은 원망의 질문이었는데 아줌마에게는 당신을 향한, 느낌표가 붙은 긍정의 대답으로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우짜겠어요?”라고 말할 때 (그러니 이렇게 살아야지요?)라고 생략한 괄호 속 말을 아줌마는 “우짜겠어요!”라고 들으며 (그래도 이렇게 살아야지요!)라고 상상한 것이다.

대화도 소설 읽는 일과 같다고 새삼 느낀다. 작가가 숨겨놓은 소설 속 의미를 독자가 찾아가는 것처럼 말하는 우리는 상대방의 생략된, 괄호 속 이야기를 찾아 뒷말을 이어간다. ‘대화하다’의 사전적 정의에 ‘이야기를 나눈다’라는 뜻이 들어가기도 하는 걸 보면 더 그렇다. 온전한 이해는 되지 않아도, 오해를 부르는 말이 될 위험이 있어도, 어떻게든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애쓰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대화란 참 근사한 일이다.


내게 2023년은 시작이 좋지 않았다. 15년을 함께 했던 고양이 ‘순대’를 하늘로 보냈고, 심한 감기몸살로 3주 가까이 앓았다. 설날에 만난 엄마의 몸 상태는 더욱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올해를 시작하며 내가 지닌 괄호 속 문장은 세상 모든 나쁜 말들의 총합이었다. 그런데 경애 아줌마의 ‘오해’가 내 괄호 속 문장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경애 아줌마가 이해한 문장으로 생각하고 몇 번 소리 냈다. 내가 지닌 괄호 속 문장의 접속사는 (그러니, 그래서, 그리하여)였는데 곧 경애 아줌마의 (그래도, 그런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바뀌었다. 괄호 속 문장의 접속사만 바뀌었는데 이렇게 힘이 난다. 역시, 말은 힘이 세다.

올해를 보낼, 나의 태도를 담은 문장을 새로 만들기로 했다. 특히 숨겨두고 속으로 다짐할 괄호 속 문장을 고심한다. 어떤 접속사로 시작하는가. 어떤 문장부호를 붙일 것인가. 내 2023년은 2월부터 시작이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