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간 동서양 무역 이어온 믈라카… 16세기엔 84개 언어 통용도

주강현 해양문명사가·前 제주대 석좌교수 2023. 2. 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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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술탄국 지배한 아랍의 동방 거점… 한 번에 배 2000척 정박
明 정화함대 이후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20세기엔 일본 침략
중국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 바닷길… 봉쇄되면 석유 등 물류 단절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해협은 단연 믈라카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해 마침내 유럽과 동양이 교류, 충돌, 융합한 해협이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손쉽게 ‘해협신문(Straits Times)’을 구할 수 있다. 1845년부터 간행한 신문이다. 해협의 나라답게 해협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믈라카는 ‘고전적 해협’이다. 그 ‘고전’이 지금도 읽히고 있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믈라카 해협은 1000년 넘도록 지구촌의 핵심 해상 교역로로 기능해 왔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페낭과 믈라카 등 동남아시아의 주요 무역 거점이 돼온 도시들이 해협에 면해 있으며 지금도 오가는 상선으로 붐빈다/자료=게티이미지 코리아·주강현 제공
믈라카의 운하에 지어진 한 건물에 명나라 정화 등 이 지역을 찾았던 외국인들을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자료=게티이미지 코리아·주강현 제공

좁은 해협으로 컨테이너, 유조선 등 큰 배가 시내버스처럼 계속 지나간다. 지난 1000년 넘게 뱃길이 끊이지 않은 길목이다. 소말리아와 더불어 해적도 여전히 ‘근무’ 중이다. 자원이 없는 믈라카 왕국은 오직 중개무역만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장사를 위해서 종교적 변신도 마다하지 않았다. 재빠르게 이슬람교로 개종해 글로벌 이슬람 상인을 끌어들이고, 아랍 상인의 동방 거점을 만들어냈다.

무역망은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는 물론이고 동아프리카, 페르시아, 지중해, 일본까지 닿았다. 식량과 주석, 금과 후추 등 온갖 박래품이 동남아시아 최초 중개무역 도시인 믈라카를 통해 동서로 퍼져 나갔다. 술탄국 믈라카는 혼잡한 항구였다. 한때 배 2000척이 정박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였다. 알 후추를 동남아시아 다른 곳에서 확보했다. 믈라카는 군사력을 써서 주변 경제 자원을 믈라카항으로 가져오도록 강요했다. 외국 무역 상인은 상품 생산자와 직거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믈라카는 15~16세기에 가장 큰 무역 중심지로 기능했다.

해협을 경영한 믈라카 왕국의 정치 외교적 처신은 능수능란했다. 지정학을 이용한 국제 감각 없이 해협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동남아시아의 패권은 시암(태국)이 쥐고 있었다. 시암은 동남아의 해상 무역 패권을 놓고 신흥 믈라카와 경쟁했다. 믈라카의 번영은 시암의 침공을 이끌었다. 이때 마침 명나라는 동남아 항로를 장악하려는 뜻을 품고 믈라카에 접근했다. 중국은 믈라카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에 기착지를 장악하려고 했다.

믈라카는 중국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즉시 사신을 중국 남경으로 보내 조공을 바쳤다. 중국은 인장과 중국 복식, 칙령 등을 내려주었다. 그때부터 믈라카는 국제 역학을 적절히 이용해 원거리 중국과 동맹을 맺고 가까이에 있는 시암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중국-인도 무역로에는 언제나 중간 지대가 필요했다. 중간 지대 점유는 실크로드 무역로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략적 위치 때문에 믈라카는 정화 함대의 중요 전초기지가 됐다. 이는 상징적 사건이었으며, 실질 위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략적으로 중국을 끌어들이고, 인도양 진출을 꾀하는 중국이 믈라카와 관계를 맺음은 서로에게 ‘윈윈 게임’이었다.

최고의 동맹은 결혼이었다. 명 공주와 측근 500명이 믈라카로 와서 정착했다. 중국인이 말레이족과 결혼해 프라나칸이라는 인종을 탄생시켰는데, 그중 남성을 바바, 여성을 뇨냐라고 한다. 해협의 운명은 믈라카와 중국이 서로 득이 되는 방향으로 흘렀다. 정화 함대는 믈라카 해협을 오가면서 무력시위를 벌여 믈라카 왕국이 국제무역 주도권을 잡는 데 도움을 준다.

1511년 리스본을 떠나 아시아로 간 포르투갈 약재상 토메 피레스에게 믈라카는 ‘눈부신 장소’였으며, ‘약속의 땅’이었다. 토메 피레스는 믈라카에서 무려 84가지 언어가 소통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탈리아 제노바 상인이 포르투갈보다 먼저 믈라카에 도착해 세계시장에 참여하고 있었다. 16세기 초반 유럽인이 당도하기 이전부터 활기찬 세계 체제가 잘 운영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포르투갈이 들어오면서 믈라카 해협의 패권은 중국에서 동남아시아 그리고 유럽의 손으로 급격히 넘어갔다. 이슬람 무역상인이 취급하던 향료 같은 상품의 공급은 유럽인, 특히 포르투갈인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랍 상인의 독점 카르텔을 깨뜨리기 위해 유럽인은 격랑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믈라카가 번영을 구가하던 바로 그 시점에 후발 주자 포르투갈이 폭력적으로 개입하여 ‘무임승차’한 것이다. 연이어 네덜란드와 영국, 심지어 20세기에는 일본군까지 쳐들어왔다.

21세기에도 믈라카는 중국과 한국, 일본 등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믈라카 해협이 봉쇄되면 중동의 유류 등 공급이 끊겨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다. 해협의 안전은 여전히 중요하다. 중국이 다각도로 믈라카 단독 노선에서 벗어나 미얀마를 통하여 서아시아로 가는 노선을 뚫고자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가 바로 믈라카 해협의 엄중함이다. 이처럼 해협은 때로는 휴화산처럼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지극히 정치적인 공간이다,

공간적으로는 미얀마와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에 이르는 믈라카 해협 일대를 ‘해협 식민지’라고 부른다. 현재도 인도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를 포함하여 해협 식민지는 여전히 ‘앵글로색슨의 바다’다. 그러나 믈라카 해협은 이주한 남양 화교와 화교 자본이 본산이기도 하다. 중국은 동남아에 엄청난 공력을 들이고 있으며, 일대일로 바닷길의 핵심 지역으로 여기고 있다. 역사에서 성찰을 얻어내고 역사를 매개로 미래를 설계하는 중국의 오랜 전통이 다시 믈라카 해협에서 발현되는 중이다. 동남아 역시 만만치 않다. 말레이시아는 물론이고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의 해양력이 급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적이면서도 중국과 결이 완전히 다른 싱가포르가 믈라카 해협의 맹주로서 웅크린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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