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상적이어서 현실적인 ‘재난매뉴얼의 역설’
오랫동안 재난매뉴얼의 현장성을 고민했는데 여전히 현실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모습에서 오히려 그 중요성을 알게 된 요즘이다. 이상적이기 때문에 현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최근 깨달은 ‘재난매뉴얼의 역설’이다. 마치 카르노 엔진(Carnot Heat Engine)이 이상적이기 때문에 실제 엔진의 성능 개선에 기준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처럼....
프랑스 과학자 사디 카르노는 1824년 이상기체(Ideal Gas)로 작동하며 분자 간 마찰이나 외부로의 열 손실이 없다고 가정한 ‘이론적인’ 열기관(Heat Engine)을 제안한다. 카르노 엔진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모델이었지만 훗날 자동차 엔진 같은 내연기관 개발의 이론적 기초가 된다. 또 이론상 최대 효율을 계산하거나 실제 엔진의 오류 및 개선점을 연구하는 데 기준으로 활용됐다.
큰 사고가 일어난 후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원들은 종종 현실에 맞지 않는 매뉴얼이 자신들을 잡는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위험한 상황에서 고생하고 최선을 다했는데 이상적인 매뉴얼 때문에 책임질 일만 생겼다고 억울해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현장에서는 매뉴얼은 현실에 적용할 수 없고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과연 현실과 다른 이상적인 매뉴얼은 불필요한 것일까?
재난매뉴얼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충분하고 필요한 자원이 적절하게 공급된다는 가정하에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조치 사항을 담는다. 그러나 가정과 달리 대부분 실제 상황은 긴박하게 진행되고 필요한 자원은 제때 도착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장에서는 각 조치 사항의 우선순위에 따라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때 우선순위를 정하고 자원을 통제하는 것이 현장지휘관의 역할이고 지휘관이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매뉴얼이다.
현장에서는 사소한 판단 오류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지휘관의 역량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또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재난매뉴얼은 지휘관이 다양한 대안을 검토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상황별 조치 사항을 촘촘하게 담고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매뉴얼은 본질적으로 이상적인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매뉴얼은 필요 최소한을 규정하고 이를 지키도록 강제하고 처벌하는 법규와는 그 적용이 달라야 한다. 판단 없이 모든 조치 사항을 기계적으로 이행하라고 매뉴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치 사항 이행 여부를 따지고 문책하는 게 아니라 열악한 조건에서 적절한 조치를 확인하기 위해 매뉴얼이 필요한 것이다. 관건은 매뉴얼을 활용하는 지휘관의 역량이 아닌가.
역설적이지만 재난매뉴얼은 이상적인 모습을 지향하기 때문에 실제 현장에서 지휘관의 올바른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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