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세계의 창]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프랑스어에서 ‘미래’를 뜻하는 단어는 두 종류다. ‘퓌튀르’(futur)가 현재의 연속으로서의 앞날, 이미 존재하는 경향성이 완전히 실현된 때를 의미한다면, ‘아브니르’(avenir)는 현재와 급진적으로 단절된 앞날, 현재와 단절된 장래를 의미한다. 후자는 단순히 ‘앞으로 될 때’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으나 ‘새롭게 도래할 때’를 가리킨다.
오늘날의 묵시록적 상황에서 우리의 미래는 핵전쟁, 생태 파괴, 전 지구적 경제 및 사회 혼돈이 수렴되는 디스토피아적 영점이다. 현재 상황을 방치할 경우 세계는 이 고정점을 향해 끌려 들어갈 것이다. 다가오는 파국과 싸우기 위해서는 이 고정된 지점으로 치닫는 표류를 중단시켜야 한다.
철학자 장피에르 뒤퓌는 파국의 위협에 올바로 맞서는 방법으로 새로운 시간 개념을 제안한다. 이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선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사이를 순환하는 폐쇄회로다. 이 시간 속에서 미래는 우리의 과거 행동에 의해 우연히 발생하고, 우리의 행동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예측과 기대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먼저 파국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 우리를 던져 넣어야 한다. “현재 일어난 파국을 막았으려면 과거 이런저런 행동들을 해야 했을 텐데”와 같은 가능성들을 ‘미래의 과거’에 소급하여 삽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던가. 두 철학자는 미래를 통제 사회로 가장 ‘비관적’으로 예측하고 고정한 뒤 그와 같은 미래가 오지 않도록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과거는 소급적 재해석에 열려 있지만, 미래는 닫혀 있다.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또다시 세계 대전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큰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 되고,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피하지 않은 일이 된다. 즉, 어떤 사건의 필연성은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소급적으로 발생한다.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이는 과거의 여러 원인에 의해 발생한 필연적인 사건으로 이해될 것이고,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두가 세계적 충돌이 가져올 치명적 결과를 의식해 파국을 피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가 오지 않은 시점에서는 미래를 파국적 사건의 발생과 미발생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으로 사고해야 한다. 파국과 재생이라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중첩된 두가지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전 지구적 파국이 존재하고 전체 역사가 그 파국을 향해 움직여야 하는 것도 필연적이고, 동시에 우리가 그 파국을 막아내야 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서로 포개진 두 필연성 중 오직 하나만 실현될 것이고, 어느 쪽이 실현되더라도 그 역사는 필연적이다.
핵전쟁도 마찬가지다. 핵전쟁의 윤곽은 이미 그려졌다. 이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급진적인 행동을 통해 전쟁을 막아야 한다. 모든 세력이 자신들은 평화를 원하며 상대 위협에 대응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은 이성적으로 행동하지만, 상대방은 비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내가 어렸을 때 화장지가 동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사람들은 헛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소문을 믿고 화장지를 사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자신들도 화장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결국 정말로 화장지가 부족해졌다.
외계인이 지구를 이미 방문했다면 왜 그들은 인간과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인간을 관찰해본 결과 관심 가질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은 아닐까. 인간은 생태 파괴와 핵전쟁 같은 자기파괴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좌파는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되어 사회적 연대를 소홀히 하고, 중도 좌파와 우파는 자본의 이익만을 대변한다. 외계인이 지구인의 질병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을 무시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새롭게 도래하는 미래를 선택한다면 외계인도 우리를 관심 가질 만한 존재로 보게 되지 않을까?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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