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헴리브라를 [홍은전 칼럼]

한겨레 2023. 2. 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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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칼럼]은별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신약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달에 한번 독감 예방 접종처럼 간편하게 맞을 수 있는 약의 이름은 헴리브라. 하지만 정부가 너무 비싸다며 약값을 깎으려 했고 제약회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급여화는 무산되었다. 새로운 고통이 시작되었다. 약이 있는데도 쓸 수 없는 고통이었다.
‘2012 세계 혈우인의날 기념행사’ 참가자들이 서울 한강시민공원 반포지구에서 ‘치료의 격차를 줄이자’는 뜻을 담은 희망화분 앞에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세계 혈우인의 날(4월 17일)은 혈우병과 선천성 출혈 질환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세계혈우연맹이 제정했다. 연합뉴스

홍은전 |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임신했을 때 은별은 아이에게 혈우병이 유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은별의 엄마 형숙이 아이를 지울 거냐고 묻자 은별은 고민이 된다고 대답했다. 형숙은 질병을 이유로 아이를 지우는 것은 우리가 해온 운동의 가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순간 은별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은별과 형숙은 장애인운동 활동가이다. 장애가 있어도 질병이 있어도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모녀의 직업이었다.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을 뒤로하고 은별은 출산을 결심했다. 유전 가능성은 50:50. 양수검사를 하면 미리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커다란 바늘을 배에 찔러 넣어 양수를 채취한다는 말을 듣고 은별은 검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양막에 바늘구멍만 한 상처도 내고 싶지 않았다. 은별은 태어날 아기를 위해 기도했다. 차마 ‘혈우병은 안 걸리게 해주세요’라고 빌지는 못하고 혈우병이 있어도 아이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2022년 2월13일 조운은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아이는 혈우병이었다. 혈우병은 지혈을 돕는 특정 응고인자가 부족해 출혈 시 피가 멎지 않는 희귀질환이다. 은별은 축복 같은 아이를 안고 매일매일이 설레면서도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가 걱정되어 눈물이 났다. 조그마한 상처라도 생길까 바닥에 내려놓지도 않으며 조심했는데도 아이가 배밀이를 하며 기어다니기 시작하자 온몸에 멍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예방치료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2회 응고인자를 정맥으로 주사해 응고인자의 수치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는 방법으로, 주사를 맞으면 혹시나 다쳐도 안심할 수 있었다. 치료는 고통스러웠다. 아기의 혈관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간호사는 아이의 손등, 발등, 목을 돌아가면서 주삿바늘을 찌르고 또 찔렀다. 주사를 맞고 돌아온 날이면 아이는 자다가도 깨서 엉엉 울었다.

주사 맞은 위치를 기록하기 위해 은별은 일기를 썼다. “아이는 간호사를 보자마자 이미 겁을 먹고 울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손등에 혈관을 잡으려 이리저리 쑤셔보다가 결국 혈관이 터져버렸다. 네명이 붙어서 팔다리를 잡아 고정했다.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 모습을 도저히 쳐다볼 수 없어 짝꿍에게 넘기고 도망쳤다. (…) 시작한 지 20분 만에 겨우 손등 혈관을 잡았다. 아이는 울다가 지쳐 더 이상 울지도 못하고 기대어 있다. 지쳐 있는 아이에게 핑크퐁 영상을 보여주며 달래고 있는데 간호사 다리에 걸려 주삿바늘이 들려버렸다. 아이가 다시 발작하듯 울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런 고통 속에 살아야 할까. 자신이 없다.”

한 줄기 빛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신약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달에 한번 독감 예방 접종처럼 간편하게 맞을 수 있는 약의 이름은 헴리브라. 초국적 제약회사 ‘주가이제약’이 만들었고 국내에서 ‘제이더블유(JW)중외제약’이 유통하는 약이었다. 2020년 전체 환자의 10%인 ‘항체 환자’에게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었고 90%의 ‘비항체 환자’들은 제외되었다. 조운이는 비항체 환자였다. 비급여로 치료를 받으려면 첫달에 2천만원, 매월 500만원이 든다고 했다. 은별이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돈이었다. 다행히 2022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헴리브라 급여를 확대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가 너무 비싸다며 약값을 깎으려 했고 제약회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급여화는 무산되었다. 새로운 고통이 시작되었다. 약이 있는데도 쓸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한푼이라도 더 벌려는 기업과 한푼이라도 더 아끼려는 정부가 환자들의 생명을 갖고 핑퐁게임을 하는 사이 희귀질환 환자들의 고통이 길어지고 있다.

은별은 1분 1초가 아까워 피가 마른다. 지난주엔 서지 못했던 아이가 이번주엔 서고, 어제는 걷지 못했던 아이가 오늘은 걸음을 뗀다. 아이는 더 많은 것을 만지고 탐색하며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더 많이 부딪치고 상처 입으며 세상을 배워나갈 것이다. 넘어지면 안 된다고, 다치면 안 된다고 아이를 가둘 수 없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엄마가 24시간 따라다닐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은별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함께 헴리브라의 전면 급여화를 촉구하는 싸움을 시작했다. 할머니의 올곧음과 엄마의 씩씩함을 물려받은 조운이의 첫돌을 축하하며, 가난하지만 강력한 투쟁 공동체를 구축한 이모 삼촌들이 수많은 ‘조운이들’의 치료받을 권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초국적 제약 자본과 의료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조운이와 함께 이 세계는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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