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혁신을 일으키는 시스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틀에 박힌 사고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 혁신의 아이콘이다. 잡스는 “혁신을 일으키기 위한 시스템은 시스템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현재 시스템에 안주하면 시대에 부응하는 창조적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런데 잡스 생각과 달리 혁신을 일으키는 시스템도 있다. '규제샌드박스 제도'는 혁신을 위해 2019년에 도입된 시스템이다. 규제샌드박스는 어린이들이 다양한 놀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모래놀이터(샌드박스·Sandbox)처럼 규제로 말미암아 신기술 제품과 서비스가 시장에 진입할 수 없을 때 일정한 기간과 장소를 정해서 규제를 유예하고 사업 안전성 등을 실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제도다.
이처럼 혁신을 위해 도입된 시스템인 규제샌드박스는 올해 시행 4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규제샌드박스 제도를 통해 규제 때문에 사업화가 어렵던 860건의 신제품·신서비스가 승인돼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이들 기업은 사업화를 통해 10조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으며, 4000억원 이상의 매출 증가와 1만여명의 고용 창출 등 성과를 이루었다. 이뿐만 아니라 아직 실증기간이 끝나지 않은 181건에 대해서도 규제 개선을 적극 추진, 법령 개정을 완료했다. 규제샌드박스는 기업의 창의성을 높이고 국민 생활 편의를 증진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인정받아 그동안 혁신 실험장으로 불려 왔다.
규제샌드박스로 이룬 혁신은 사실 우리 생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딩동! 테슬라 0.1주 체결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주식투자 열풍이 불면서 해외주식에 관심이 높아질 때 '해외주식 소수점 거래' 서비스가 규제샌드박스 과제의 하나로 시행됐다. 이를 통해 증권사는 투자자 확보가 용이하게 됐고, 일반인도 소액으로 쉽게 해외주식에 투자할 수 있게 됐다.
아마존, 알리바바 등 글로벌 기업이 물류체계 혁신을 위해 로봇을 도입하며 물류산업에서 로봇의 중요성이 급부상하고 있다. 미국·유럽 등에서는 실외 배송 로봇 운영을 위해 제도 개선과 실증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규제에 막혀 테스트조차도 할 수 없었다. 이 또한 규제샌드박스 제도를 통해 '자율주행 로봇 배달' 서비스 문이 열렸다. 이제 자율주행 로봇이 배달하는 음식을 먹을 날도 멀지 않았다.
그리고 공항을 사용하는 교통 약자의 짐을 대신 수령해서 목적지로 배송하는 '휠체어 장애인 짐 찾기 도움 서비스'도 실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정식으로 사업화되면 앞으로 공항을 이용하는 교통 약자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밖에도 가족 단위 관람객과 연인들이 여러 이벤트와 함께 최신 개봉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소형 영화관', 은행의 대출 상품을 온라인으로 비교할 수 있는 '온라인 대출 비교 서비스', 여러 음식점 사업자가 주방을 공유하는 '공유주방 서비스' 등과 같이 규제샌드박스 제도를 통해 세상에 나온 신산업들이 우리 일상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신산업이 규제샌드박스로 시장에 진입해서 신기술 제품과 서비스를 출시하고 있지만 이것은 과정일 뿐 완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2년의 연장 기간까지 포함하면 최장 4년 동안 시장에서 실증을 거쳐 안전성이 입증되고 법령이 개정돼야 정식으로 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규제 유예를 통해 실제 시장에서 사업성을 검증해 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규제샌드박스는 유용한 제도이지만 신산업에 적합하지 않은 규제를 개선하기 위한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법령 정비는 제도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올해는 제도를 도입한 지 4년이며, 최장 4년의 유효기간이 종료되는 과제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해이기도 하다. 그동안 실증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규제샌드박스 제도가 법령 정비 중심으로 전환해야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정부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법령 정비 중심으로 규제샌드박스를 운영하기 위한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유효기간 종료를 앞둔 과제들을 점검해서 법령이 신속하게 정비될 수 있도록 집중 관리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또 규제샌드박스 특례를 신청하려는 과제 가운데에서 선제로 규제 정비가 필요한 과제들을 즉시 규제 개선을 추진하는 '신속정비 트랙' 도입도 준비하고 있으며, 규제샌드박스 승인 절차를 좀 더 신속하게 진행하기 위한 제도 개선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혁신 도구로서 규제샌드박스의 실효성을 더 높여 나갈 것이다.
잡스의 말처럼 혁신 정신을 메마르게 하는 시스템도 있을 것이다. 정부는 앞으로도 규제샌드박스가 명실상부한 혁신의 문을 여는 시스템이 될 수 있도록 계속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이정원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
〈필자〉이정원 국무2차장은 규제 분야에 잔뼈가 굵은 규제정책 전문가다. 행정고시 36회로 공직에 입문해 국무조정실 규제총괄과장, 규제혁신기획관, 규제총괄정책관, 규제조정실장 등 규제 분야 필수보직을 역임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프랑스 파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국 규제정책과에 근무하면서 선진 규제사례 연구 등 활동을 한 바 있다. 지난해 6월 취임 이후 규제혁신전략회의·규제심판제도를 신설하고 규제혁신추진단을 출범시켜 윤석열 정부의 규제혁신 체계를 정립했다. '대형마트 영업규제 완화' 같은 굵직한 규제부터 '無라벨 생수 낱개 판매' 같은 민생 규제까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규제혁신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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