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칼럼] EU와 미국 탄소중립 활용법
지난해 8월 미국에서는 탄소 감축에 도움 되는 제품의 생산과 구매 활동을 지원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시행됐다. 향후 10년 동안 태양광, 풍력, 전기차, 히트펌프 등에 3690억달러(약 450조원)의 예산을 세액공제·보조금 등 직접 개입 방식으로 투입하는 것이다.
지원받는 제품은 매우 제한적인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예를 들면 북미 현지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여야 한다거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추출·가공된 광물 또는 부품 비율에 따라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유럽연합(EU)과 중국 등은 IRA가 세계 보호무역주의 경향을 강화하고 미국의 배타적 산업정책의 일환이라고 비판했고, 학계와 시민사회는 기후변화 대응의 글로벌 공조에 역행하는 조치라며 염려했다. 하지만 2024년 대선 승리와 탄소중립 경제로의 이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조 바이든 정부로서는 IRA를 치적으로 홍보하면서 적극 이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EU는 미국 IRA를 무역 공정성을 해치는 악법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유럽 기업의 북미로의 이전이나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고 있다. 실제 역내 산업정책을 총괄하는 티에리 브르통은 IRA를 유럽 경제의 '실존적 도전'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12월 EU 정책 의사결정권자들은 기존 집행위원회의 제안보다 강한 수준에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합의를 했다. 그리고 올해 1월에는 EU 집행위원회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IRA의 EU판이라 할 수 있는 '탄소중립산업법'(Net-Zero Industry Act) 제정을 공식화했다. 이 법을 통해 향후 30년 이내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재생에너지, 그린수소, 히트펌프 등의 탄소감축 기술 분야에 집중 투자해서 관련 산업 육성을 가속하겠다는 의지를 구체화한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은 탄소가 국제통상의 핵심 기준이 되었음을 알리는 본격 서막일지도 모른다. 즉 탄소가 환경 이슈이자 통상 이슈가 됐고, 환경과 경제의 커플링 수준이 점차 강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EU는 CBAM을 통해 역내로 수입되는 제품의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에 과세함으로써 EU 내 탄소 다배출 기업의 역외 이전을 막고자 한다. 이른바 '탄소 누출'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입기업에서 탄소비용 징구를 통해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EU 재정수입을 확보하는 실익을 기대하는 것이다. 반대로 CBAM을 통해 EU 역외 수출업체의 탄소 감축을 유도해서 세계의 온실가스를 감축해 나가겠다는 대외 명분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이런 명분 쌓기와 EU 탄소배출권거래제(ETS)의 무상할당 폐지 등을 통해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기술장벽(TBT) 협정 위반을 회피하겠다는 계획이다. 요약하면 탄소를 국제통상 기준으로 삼아 현대 사회가 직면한 지상 최대 과제인 탄소중립을 달성하는 데 EU가 핵심 역할을 하고, EU의 미래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경제안보 전략인 셈이다.
우리나라 산업은 무역이 국내총생산(GDP)의 60~70% 수준에 이르고, 고탄소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만큼 CBAM과 같은 조치는 심각한 무역 장벽으로 작동할 수 있다. 기후변화로 말미암은 피해 규모가 커질수록 탄소중립의 속도 및 적용 범위 기준은 더 엄격해질 것이다. 한국 정부와 산업계가 과학적인 분석에 기반을 두고 미래지향적인 대응 전략과 그에 부합한 정책을 수립하지 못할 경우 국내 기업이 운신할 폭은 좁아질 수 있고, 그만큼 디폴트 리스크가 커질 공산도 배제할 수 없다. EU와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탄소중립이라는 새로운 국제통상 전쟁에서 CBAM과 같은 조치의 의미는 무엇이며, 국내 정부와 기업은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 전문가 논의와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서정석 김앤장 ESG경영연구소 전문위원(공학박사) jeongseok.seo@kimch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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