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30분씩 말 쏟아내는데… 내용은 난수표·안 들림·뜬금포
녹취록에 ‘안 들림’ 표시 등 대통령실도 정확한 내용 몰라
“옛날에 선거 때 막 돈 쓴다고 그러면 선거자금은 뭐 한 100억을 뿌렸는데 막상 유권자에게 10%만 돌아가도 선거에 이긴다는 옛날얘기가 있었잖아요….”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1월9일 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여성가족부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은 뒤 쏟아낸 마무리 발언 가운데 일부다. 이날 윤 대통령은 약자 복지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검증되지 않은 얘기를 하거나 국정과제와는 거리가 먼 사례 등 발언을 쏟아냈다. 글로 기록하면 5천 자 가까이 된다.
1월30일 금융위원회 보고를 마지막으로 끝난 이번 업무보고는 대통령 취임 이후 두 번째였다. 대통령실은 이번 부처 업무보고가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를 국민에게 직접 하는 형식의 ‘대국민 보고’가 될 것이라고 홍보했다. 2022년 여름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 대통령과 각 부처 장관이 독대 형식으로 진행한 첫 업무보고와 달리, 이번 보고는 부처 관계자뿐 아니라 전문가와 정책수요자 등 수백 명을 참석시켜 규모 면에서 이전과 비교가 안 됐다.
이 때문에 대통령실 안팎에선 핵심 정책에 관한 대통령의 생각을 부처 공무원들과 민간이 직접 공유할 기회가 되리라고 기대했다. 대통령실은 “오로지 국민과 국익만 생각하고 나아가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확고한 철학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업무보고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난수표에 가까운 대통령의 말
그만큼 정제되고 핵심을 관통하는 대통령의 발언을 기대했지만 막상 공개된 발언 내용은 번번이 입길에 올랐다. 업무보고 때마다 대통령이 30분 안팎으로 쏟아낸 마무리 발언엔 현실과 거리가 있는 인식을 드러내거나 논란을 일으킨 내용이 적지 않았다. 발언 분량은 엄청났지만 요점을 알기 힘든 ‘난수표’에 가까운 말도 많았다.
윤 대통령은 1월5일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학교 다닐 때 국어가 재미가 없었다. 우리말을 무엇 하러 또 배우나. 저도 학교 다닐 때 국어가 재미가 없었다. 문학 하시는 분들은 청록파, 이런 것을 국어라고 했지만 그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어떤 시라든가 이런 거를 놓고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뭔가 자기의 느낌을 적는다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한다면 재미없어할 사람이 아마 없지 않겠나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에 대해 학생들이 자신의 느낌을 적는 수업은 이미 현재 교육과정에 포함돼 있다. ‘청록파는 국어가 아니다’라고 단정했지만 이런 지적에 해당 교과 교사들이 동의할지도 의문이다.
업무보고에서 굳이 왜 이런 발언을 한 것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적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일본도 이제 머리 위로 (북한의) 아이아르비엠(IRBM·중거리탄도미사일)이 날아다니니까 방위비를 증액하고 소위 반격 개념을 국방계획에 집어넣기로 하지 않았나.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나”(2022년 12월11일 외교부·국방부 업무보고)라고 말해 방위비 증액을 뼈대로 한 일본 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을 용인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월9일 복지부 업무보고에선 연금개혁의 기초작업을 강조하면서 뜬금없이 대법원 표결을 비유로 들기도 했다. “어떤 케이스가 대법원에 올라가면 대법원에 법관이 13명이다. 올라가자마자 대법관끼리 표결을 하는 게 아니다. 충분히 연구하고 자료 조사하고 회의도 하고, 전원합의로 결론이 안 날 때마다 표결에 들어가는 것이다.” 연금개혁도 기초 자료 수집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예를 든 것이지만, 표결을 위한 자료 수집과 국민 여론 수렴을 위한 기초작업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긴 힘들다.
“아는 게 많아 즉흥 발언을 20분 넘게”
정부 정책을 국민에게 소개하는 ‘대국민 보고회’라는 설명이 무색하게 야권을 겨냥한 ‘정치적 발언’도 자주 등장했다. “과거 정부가 부동산 문제와 환경 문제를 어떤 정치와 이념의 문제로 인식했다”(1월3일 국토교통부 업무보고), “생산되는 쌀이 시장에서 어느 정도 소화하느냐와 관계없이 무조건 정부가 매입해주는 이런 식의 양곡관리법은 농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1월4일 농림축산식품부 업무보고) 등이다.
대통령실은 업무보고가 끝난 뒤 매번 대통령의 전체 발언을 정리해 공개했다. 이를 두고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마무리 발언은 사전 원고 없이 즉석에서 대통령의 생각을 전한 것”이라며 “대통령이 갖고 있던 평소 생각, 소신, 철학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실 일부 인사는 “대통령이 아는 게 얼마나 많으면 즉흥 발언을 20분 넘게 하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방대한 발언을 곧바로 녹취록으로 풀어서 공개하다보니 대통령실에선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해프닝’도 벌어진다. 1월30일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직후 공개한 마무리 발언 내용을 보면, “독일 같은 후발(안 들림)은 직접 금융보다는 창업 대출을 통해서 국가가 어느 정도 관치금융시스템으로 산업을 부흥시켜왔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대통령실에서 대통령의 발언을 전달하면서 도저히 확인하기 힘든 발언을 두고 ‘(안 들림)’ 표시를 한 것이다. 1월5일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업무보고 마무리 발언 전문에는 ‘(안 들림)’ 표시가 무려 5곳이나 있었다. 대통령실도 윤 대통령이 무슨 발언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럼 부처 관계자나 전문가, 정책수요자와는 어떻게 소통했다는 것일까. 윤 대통령의 미국 순방 중 나온 ‘이 ××’ 발언 논란 뒤 아무도 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설명할 대변인도 없는 초유의 상황
이렇다보니 대통령실 주변에선 폭포수와 같은 윤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우려가 적지 않다. 국정 철학이나 기조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발언 속에 부적합한 사례, 부적절한 인용, 굳이 필요 없는 발언도 늘어가기 때문이다. 자칫 핵심 메시지는 사라지고 실수만 부각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 아니냐는 게 대통령실의 고민이다. 더구나 현재 윤 대통령의 ‘입’인 대통령실 대변인과 부대변인은 모두 공석인 초유의 상황이다.
국민에게 각인되는 대통령의 메시지는 장편소설보다 명료한 ‘한 줄의 시’일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메시지가 명료해야 국민도 그 메시지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적을 수 있다.
배지현 <한겨레> 정치부 기자 bee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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