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서 피어난 ‘생의 찬미’···앙드레 브라질리에 ‘멈추어라, 순간이여!’

김찬호 기자 2023. 2. 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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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대미술의 ‘살아있는 전설’로 평가받는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멈추어라, 순간이여!’ 특별전이 지난 1월 31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주간경향] 낯설다. 화가의 이름도, 대상의 경계가 뚜렷했다 희미해지는 화풍의 변화도. 왜 이쪽 오케스트라 그림의 배경은 빨간색이고, 왜 저쪽은 노란색인지. 왜 물가를 달리는 말은 배경색과 구분이 어려운 푸른색인지. 머리로 그림을 이해하려는 관람객에게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작품세계는 어느 날 갑자기 던져진 수수께끼 같다.

잠시 복잡한 추론을 멈추고 접근법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감상은 공부와 다르다. 배경지식을 알면 더 많은 것이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을 마주한 찰나에 생기는 ‘감정’이다. 그림을 통해 얻은 느낌만 남기고 복잡한 해석은 도슨트나 기자의 일로 넘기면 된다.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하나 따지며 너무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올해 94세를 맞은 원작자 브라질리에가 관람객들에게 전한 당부다.

평생을 그림에 바친 거장은 “신께서 삶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특권을 준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얻어갈 것은 ‘삶은 기쁨’이라는 감상 정도면 충분하다. 실제로 그의 그림 대부분은 일상 속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한 순간들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의 진짜 제목 ‘멈추어라, 순간이여!’처럼.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멈추어라, 순간이여!’ 특별전에 전시된 그림 <콘서트>. 브라질리에는 콘서트에서 느낀 감정을 색으로 표현했다./김찬호 기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거장의 예술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회고전은 주최 측과 이를 소개하는 도슨트의 밤잠을 설치게 한다. 샤갈, 마티스, 피카소처럼 한국인에게 익숙한 이름을 내세운 전시는 원화를 몇 점 가져오지 못해도, 유사한 기획을 반복해도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전시는 원화만 130점을 가져오고도 불안에 떨어야 한다. 유럽에서 인정받는 거장의 작품을 주요 활동 무대인 프랑스가 아닌 한국에서 집대성했음에도 외면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점점 더 새로운 예술가를 소개하는 전시를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SNS 인증용 전시’가 각광받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녹록지 않은 현실을 뚫고 앙드레 브라질리에가 한국 관람객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심지어 이 전시는 본래 2021년 공개를 목표로 추진됐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기약없이 순연됐다가 지난해 말 되살아났다. 반드시 지금이어야 했다. “생전에 한국 관람객들과 만나고 싶다”는 94세 예술가의 바람을 더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앙드레 브라질리에는 한국 전시가 시작된 후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 작품활동도, 인터뷰도 할 수 없다. 이번 한국 전시는 어쩌면 80여년을 오롯이 예술에 바친 거장이 기억할 마지막 전시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는 상황에서 전시는 지난해 12월 20일 막을 올렸다. 한 달여가 지나 개막 초의 혼란과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지난 1월 31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을 찾았다. 평일 오전 10시임에도 매표소 앞으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11시에는 미술 해설 분야의 스타 정우철 도슨트의 작품 해설이 있었다. 이를 감안해도 평일 오전 전시관 입구를 가득 메운 인파는 생경했다.

지난 1월 31일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멈추어라, 순간이여!’ 특별전 해설을 맡은 정우철 도슨트가 관람객들에게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이날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림을 즐겼다. 누군가는 개인 관람을, 또 다른 누군가는 도슨트의 도움을 받았다. 정답은 없다. 다만 더 나은 방법에 대한 조언은 있다. “선입견 없이 먼저 감상하라. 그다음 찬찬히 설명을 들어도 충분하다. 시간이 된다면 해설을 듣고 다시 한 번 그림을 보며 생각을 정리해볼 것을 권한다”. ‘전시를 어떻게 감상해야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정 도슨트가 남긴 대답이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은 이번 전시 작품들에 대한 설명이다. 전시장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잠시 이 기사를 읽지 않아도 좋다. 작품 감상 후에 기사를 다시 읽으면 좋겠지만 지나치는 분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전시 관람 시 받을 감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꼭 알고가면 좋을 핵심만 정리했다. 첫째, 이 전시에 걸려 있는 작품들은 모두 원화다. 브라질리에가 직접 붓을 대고 그린 진본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의미다. 둘째, 그럼에도 작품 앞에 유리막이나 차단봉 등이 없다. 작품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해 관람객들이 작품 속 붓 터치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결과다. 셋째, 별도의 안전장치가 없다 보니 음료는 전시장에 갖고 들어갈 수 없다.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몰리며 탈수 증상을 겪을 수 있다. 실제로 기자가 방문한 날 어린 학생이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충분히 수분을 섭취한 후 관람하기를 권한다. 넷째, 전시장 곳곳에 작품의 이해를 돕는 장치들이 있다. 어떤 장소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나오고, 또 다른 장소에서는 나뭇가지들이 바닥에 놓여 있다. 이들 장치를 감상에 활용하면 훨씬 더 재미있는 관람이 가능하다. 다섯째, 도슨트 프로그램이 운영중이다. 정우철 도슨트뿐만 아니라 최예림, 한지원 도슨트가 작품 이해를 돕는다. 무료로 진행되는 만큼 작품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를 얻고 싶은 이들이라면 꼭 이용해보길 권한다.

■삶의 아름다움, 거장의 작품세계

<앙드레 브라질리에>전의 문을 여는 것은 ‘음악’이다. 그는 클래식 콘서트장의 모습을 다채로운 색깔로 표현했다. 붉은색·노란색으로 채색된 콘서트장은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며 느낀 그의 감정이다. 즉 브라질리에는 청각의 예술인 음악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의 예술인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작품이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은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더욱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연주자의 형태가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지 않다. 감정을 전하는 그림에서 사실적 묘사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감상을 담았음에도 강렬한 색채를 사용한 그림은 없다. 대부분 파스텔을 칠해놓은 듯한 은은한 색감이다. 관람객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봤으면 하는 의도를 담았다. 이는 브라질리에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그는 열한 살 때 처음 그림을 그렸다. 당시는 1940년이었고, 그가 머물고 있던 곳은 제2차 세계대전 최고 격전지인 프랑스 북부의 덩케르크였다.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겪은 그는 “세상에는 너무 끔찍하고 아픈 것이 많기 때문에 내 그림에는 삶의 아름다움만을 포착해 넣겠다”고 다짐했다. 80여년 동안 이 신념을 지켰다.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서커스를 소재로 한 그림을 관람객들이 감상하고 있다./한수빈 기자

그를 평생 괴롭힌 전쟁의 기억은 작품 속 또 다른 주제로 나타난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예술가들이 작품 소재로 애용한 ‘서커스’다. 과장된 분장을 한 광대들의 모습은 멀리서 볼 땐 웃는 모습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마치 우는 모습처럼 보인다. 전쟁이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가장 비현실적인 상황인 것처럼 서커스 역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비현실적인 활동이다. 브라질리에는 서커스 속 광대들이 시대의 아픔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서커스는 브라질리에의 화풍 변화를 보여주는 대조군이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의 작품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이 서커스 그림 속에서였다. 비교적 초기 작품으로 분류되는 서커스 속 말은 분명한 윤곽선을 가진 역동적인 모습이다. 반면 그가 자연을 표상하는 상징으로 말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점차 윤곽선이 사라지고 말을 표현하는 색도 배경인 자연의 색과 닮아간다. 정 도슨트는 이를 “서커스 속 말이 자연으로 뛰어나와 그 일부로 붙어버렸다”고 표현했다.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말을 소재로 한 그림을 관람객들이 감상하고 있다./한수빈 기자

‘왜 이렇게 말을 많이 그렸느냐’는 질문에는 그조차도 분명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어쩌면 화가에게 말은 자연을 표상하는 도구 정도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흥미로운 건 브라질리에의 말이 자연의 일부로서 점차 흐릿해지지만, 결코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현대미술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그는 현대미술로 넘어가지 않은 이유를 “언제부턴가 그림을 배우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그림이 대세가 되며 일반 관람객들과의 소통이 끊겼다. 나의 그림을 보고는 누구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자연으로서의 말을 지나 등장하는 소재는 계절이다. 특히 겨울 ‘눈 내리는 풍경’이 많았다.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점묘법을 적극 활용했다. 파스텔톤의 화사한 배경 위로 하얀색 눈이 내리는 모습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 ‘눈 오는 마세의 작은 성’이다. 마세의 작은 성은 그의 고향집이다. 이곳을 떠나 성장한 화가가 50년 만에 돌아와 유년기의 행복한 추억이 남아 있는 집을 바라본 순간을 담았다. 전시의 부제 ‘멈추어라, 순간이여!’가 이 그림에서 탄생했다.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멈추어라, 순간이여!’ 특별전에 전시된 그림 <눈 오는 마세의 작은 성>. 겨울 눈 내리는 풍경을 점묘법으로 표현했다./김찬호 기자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멈추어라, 순간이여!’ 특별전에 전시된 그림 <눈 오는 마세의 작은 성>을 관람객이 감상하고 있다./한수빈 기자

이번 전시를 특정 대상에게 추천해야 한다면 단연 ‘시작하는 연인’들이다. 전시장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주제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에게 한 명씩 있다는 ‘뮤즈’가 그에게도 있다. 부인 ‘샹탈 브라질리에’다. 파스텔톤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은 그가 바라본 아내의 모습들이다. 브라질리에는 한 번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샹탈에게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 그의 일상 속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순간을 포착해 그렸다. 그림마다 애정이 깃들어 있다고 느낀다면 이 때문이다.

연인들에게 전시를 추천하는 이유가 단순히 부인이 ‘뮤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브라질리에와 샹탈은 1958년 로마에서 만났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둘은 3개월 만에 결혼해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전시장에는 샹탈을 담은 그림들이 쭉 전시돼 있는데, 뮤즈를 그리는 한 화가를 표현한 그림에 주목해볼 것을 권한다. 단순히 샹탈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이 그림은 1956년 작품이다. 샹탈을 만나기 2년 전이다. 샹탈을 만난 후 그린 그림과 아무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화가는 상상 속 뮤즈를 현실에서 찾은 셈이다.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멈추어라, 순간이여!’ 특별전에 전시된 그림들. 브라질리에의 부인 샹탈 브라질리에를 뮤즈로 그린 그림들이다. /한수빈 기자

■전시가 남긴 것

<앙드레 브라질리에>전의 작품 소재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식당에서 피아노 연주를 즐기며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는 모습, 암스테르담의 가을 풍경, 불꽃놀이 등이 주요 소재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가 ‘삶의 기쁨’이라는 점과 연결하면 행복은 특별한 순간이 아닌 일상의 소소한 순간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전쟁으로 일상이 파괴됐던 작가는 그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또 갈구했다.

전시설명을 위해 오랜기간 작품을 연구한 정 도슨트는 “결국 브라질리에가 전하고 싶었던 건 ‘행복이란 큰 기쁨 속에 있지 않고 아주 작은 기쁨의 반복에서 온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며 “관람객들이 인생이라는 캔버스 위에 소소한 사랑과 행복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점을 느끼고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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