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무기 요청에 집착하는 젤렌스키, 전쟁 아닌 협상 전략?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2023. 2. 5.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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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지속적인 피해 축적에 따른 ‘병력 부족’ 시사
러시아, 병력 우위 바탕 장기전으로 이끌 가능성 커

(시사저널=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2월24일로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지 1년을 맞는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최근 들어 서방에 고성능 무기체계를 대대적으로 요구하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지난해 고립무원 상태에서 러시아의 기습을 받았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서방 각국을 상대로 감성적인 연설 외교로 대대적인 지원을 이끌어내 지금까지 군사적·외교적으로 버틸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미국·영국 등 서방으로부터 다량의 무기를 얻어냈지만, 실제 성능은 제한적이었다. CNN에 따르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중심의 서방은 핵보유국 러시아와의 확전을 우려해 강력한 공격력의 전차 지원을 꺼려 왔으며, 대신 대전차무기인 FGM-147 재블린이나 NLAW 등 방어무기를 주로 제공했다. 스트라이커 기갑전투차, 브래들리 장갑차도 넘겼다. 러시아군의 미사일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의 MIM-104 패트리엇, 영국의 스타스트릭 HVM, 독일의 IRIS-T 등 방공 미사일도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말부터 러시아가 동부 전선에서 보급로 확보 등을 위해 용병인 바그너그룹(러시아어로 그루파 바그네르)을 동원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더욱 강력한 무기를 간절하게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서방도 이에 반응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월11일 우크라이나 리비우 리차키프스키 묘지에서 전쟁 중 전사한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추모하고 있다. ⓒUPI 연합

고성능 미사일·전투기 등 추가 요구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서방이 제공을 금기시했던 전차를 드디어 제공받기에 이르렀다. BBC에 따르면 지난 1월 중 독일산 레오파르트2 A4(독일 14대, 폴란드 14대, 캐나다 4대), 미국산 에이브럼스(미국 31대), 영국산 챌린지2(영국 14대) 등 고성능 서방 전차 제공이 결정됐다. 영국이 선도적으로 챌린지2 제공을 결정하면서 미국과 독일이 압박을 받은 모양새다. 

독일 국제방송인 DW(도이체벨레)에 따르면 독일은 한참을 망설인 끝에 우선 과거 자국산 레오파르트2 전차를 구입했던 국가들이 이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것을 허용한 뒤, 추가로 자국 전차 지원도 결정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제 T-72M1을 기반으로 개발한 주력전차인 PT-91 30대도 지원하기로 하는 등 나토 회원국을 중심으로 모두 300대 이상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이 가운데 초도 물량으로 120~140대가 인도될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자 젤렌스키는 격전지 동부 전선을 시찰한 뒤 1월29일 비디오 연설에서 콕 집어 서방의 고성능 무기를 추가 요구했다고 AP·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젤렌스키는 사거리 297km의 지대지 미사일인 에이태큼스(ATACMS)에 미국산 전투기 F-16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각각 더욱 사거리가 길고 더욱 정밀한 무기다. 화력이 막강한 미국제 지상공격기 A-10도 요구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렇다면 젤렌스키는 왜 이렇게 고성능 무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물론 충분한 병력과 고성능 무기는 병참과 함께 전쟁 승리의 핵심 요소이긴 하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서방 무기의 덕을 톡톡히 본 것도 사실이다. 미국이 뒤늦게 지원한 최대 사거리 80km의 M142 하이마스(HIMARS) 다연장 로켓포는 지난해 11월 헤르손 탈환 작전에서 큰 전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고 프랑스 국제방송인 '프랑스24'가 보도했다.

하지만 전쟁 피해가 쌓인 현재 상황에서 고성능 무기를 추가 공급받는다고 해도 새로운 공세를 펼쳐 크림반도 등 러시아와 친러시아 세력이 장악한 지역을 추가로 수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뉴욕타임스가 지적했다. 핵보유국인 러시아의 본토를 공격하는 것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보다 서방이 이를 말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젤렌스키가 무기 지원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은 지속적인 피해 축적에 따른 '병력 부족'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부족한 병력을 서방이 제공하는 무기로 메우려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큰 것이다. 

러시아 대공세 꺾고 유리한 국면 조성 노려 

실제 현재 전황은 녹록지 않다. 가디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동부 돈바스 지역의 바흐무트 주변에서 러시아의 용병집단인 바그너그룹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병력 소모가 심할 수밖에 없다. 젤렌스키가 직접 전선으로 달려가 상황을 확인하고 올 이유가 있었다.

젤렌스키의 고민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미국 싱크탱크인 전쟁학연구소(ISW)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지난해 9월 부분동원령으로 확보한 30만 병력을 앞세워 조만간 이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시기는 예비군의 훈련이 축적되고 보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봄으로 전망된다.

러시아는 병력 우위를 바탕으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 가능성이 커 보인다. 우크라이나 병력에 대한 '고기 분쇄식' 소모전을 노린다고 볼 수 있다. 젤렌스키도 이런 점을 알고 있다. 1월29일 연설에서 그는 "러시아의 전략은 시간을 끌어 우리 병력의 소진을 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젤렌스키는 러시아군의 공세를 꺾고 실지를 추가로 확보해야 국내에서 운신의 폭을 확보할 수 있다. 모스크바와의 정전 협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어차피 전쟁이 우크라이나를 흡수하려는 러시아 민족주의와 절대 흡수될 수 없다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충돌이니만큼 영토와 정전 조건에 대한 양국 국민의 반응은 예민할 수밖에 없다. 이는 지도자의 운명과 직결되는 요인이다. 

이 시점에서 젤렌스키가 지난해 12월21일, 10시간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회담하고 미 의회에서 연설한 사실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바이든의 환영과 추가 지원 약속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외국 개입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공화당 등 미 의회 일각의 차가운 분위기를 젤렌스키가 확인하는 기회가 됐을 수도 있다.

결국 젤렌스키는 서방 지원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확보한 뒤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군의 대공세를 물리치고 명분을 쌓은 상태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담판하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모스크바와 키이우 모두 이 전쟁을 무작정 지속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도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각국 지도자들의 국내 정치적 부담도 작지 않다. 이는 젤렌스키도 푸틴도 마찬가지다. 고령에도 내년 11월 선거에서 재선을 노릴 것으로 전망되는 바이든이 누구보다 크게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모두 지체할 시간이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이미 물밑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명분과 현실이 모두 전쟁 종결을 가리키고 있다. 모두가 지쳐가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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