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의 땅’ 찾은 교황 “폭력, 책임 떠넘기는 비난 그만”

조일준 2023. 2. 4. 16: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남수단 첫 방문…치유와 평화의 순례
\"풍부한 천연자원은 축복, 부의 독점 부르는 부패 경계해야\"
2023년 2월14일 남수단 수도 주바의 성데레사 성당에서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미사 집전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화해가 필요합니다”, “힐링(치유)”라고 쓴 손팻말이 보인다. 주바/로이터 연합뉴스

“발이 퉁퉁 부었지만 피곤한 줄 모르겠어요. 영혼이 함께 있다면 지치지 않아요.”

2월3일(현지시각) 아프리카 남수단의 북부 룸베크에서 약 300㎞를 걸어 수도 주바에 도착한 나이트로즈 팔레아의 입술은 바짝 말라 갈라졌지만 벅찬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60여명의 가톨릭 신자 순례단과 함께였다. 팔레아는 영국 <비비시>)(BBC) 방송에 “교황의 축복이 우리나라를 변화시킬 거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아프리카를 순방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민주콩고에 이어 이날 사흘 일정의 남수단 방문을 시작했다. 가톨릭 교황이 남수단을 찾은 건 처음이다. 남수단은 오랜 내전 끝에 2011년 수단에서 독립한 공화국으로, 인구의 60%가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이 주류인 기독교 신자이다. 민간신앙이 33%로 뒤를 이으며, 이슬람교도는 6%남짓에 불과하다. 수단 인구의 약 92%가 이슬람교를 믿는 것과 확연히 대조된다.

수단은 1956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이후 2005년 평화협정으로 남수단 독립의 토대가 마련되기까지 반세기 동안이나 참혹한 내전을 겪었다. 북부의 아랍계 무슬림과 남부의 아프리카계 기독교도·토속신앙인 간의 충돌이자, 풍부한 석유자원과 희소한 수자원을 둘러싼 투쟁, 토착 군벌의 권력 다툼 등 복잡한 분쟁 원인이 얽히고설켰다. 제1차 내전 (1955~1972)에 이은 제2차 내전(1983~2005)에서만 최소 190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되지만, 정확한 사망·실종자 수는 아무도 모른다. ​남수단은 한국의 고 이태석 신부가 생전에 의료봉사 활동을 하며 제자들을 길러낸 곳이기도 하다.

남수단의 유혈 분쟁은 교황의 방문 전날에도 이어졌다. 중앙 아콰토리아 주에서 유목민들과 다른 주민 간의 충돌로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트위터에 “그런 이야기가 너무 자주 들린다. 이제 다른 길을 가기를 다시 한번 호소한다. 평화를 위해 모두가 함께하기를”이라고 썼다.

2023년 2월3일 남수단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맨 왼쪽)이 대통령궁에서 살바 키르 남수단 대통령(오른쪽)의 영접을 받고 있다. 주바/UPI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도 주바에 도착하던 날, 남수단은 거대한 축제 분위기였다. 주바 공항에는 살바 키르 대통령이 지팡이를 짚은 채 직접 나와 교황을 영접했다. 키르 대통령은 2019년 4월 라이벌 반군 지도자와 함께 교황청에 초청받아 갔다가 예상치 못한 교황의 ‘발 입맞춤'에 황송해하며 얼어붙었던 인연이 있다.

주바 거리는 수십만 인파로 가득 찼다. 성데레사 성당 앞에 모인 사람들은 흥겹게 노래 부르고 춤추며 교황을 기다렸다. 내전의 트라우마가 깊은 한 여성 순례자는 “죽음과 절망의 냄새를 맡았다면 온 힘으로 평화를 갈구하게 될 것”이라며 “교황은 예언자이고, 그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뤄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남수단 방문에 영국 성공회 수장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 의장 이언 그린쉴즈 목사가 동참한 것도 평화와 화합의 상징으로 특별한 눈길을 끌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저녁 키르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관리, 외교단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한 연설에서 “나는 진심으로 여러분이 이 말을 받아들이길 간청한다. 유혈사태는 그만, 분쟁도 그만, 폭력도 그만, 그리고 책임을 떠넘기는 비난도 그만”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어 “남수단에 풍부한 천연자원은 축복이지만, 자원 개발로 생기는 부를 일부가 독점하는 부패를 경계해야 한다”며 “돈의 불공평한 분배와 부를 축적하기 위한 비밀 계획, 투명성의 부족은 인간 사회의 바닥을 어지럽힌다”고 말했다.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소개를 받은 웰비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 정치인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거의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옵니다. (여러분의) 발을 씻고, 말을 듣고,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o.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