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영어 명칭’ 둘러싼 한-중 온라인 전쟁의 이면 [임명묵의 MZ학 개론]

임명묵 작가 2023. 2. 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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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Chinese New Year”에 맞서 韓 “Lunar New Year”
설날 문화 기피하면서도 명칭은 정체성 규정하는 지표 돼

(시사저널=임명묵 작가)

설날은 지난날과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의 명절이다. 하지만 설날이 단순한 명절이 아님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시간에 의미와 상징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특정한 시간을 기념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본다면 설날을 둘러싸고 한국에서는 크게 세 시기의 논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흥미롭게도 이 논쟁의 내용들은 모두 당시 한국 사회가 처한 상황과 그에 따른 도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설날을 둘러싼 첫 번째 논쟁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병탄했는데, 이 과정에서 19세기 후반에 메이지유신이 단행했던 양력설 개혁을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했다. 물론 조선도 근대화 과정에서 양력을 도입하고 양력의 새해 첫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지만, 당시 총독부는 음력설 자체를 규제하고 양력설을 유일한 설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양력설로 설날을 일원화하려는 흐름은 독립 이후에도 여전해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대로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양력설 도입의 역효과가 발생했는데, 양력설이 외세와 독재 정부가 시간과 문화마저 새롭게 규정하려 하는, '위로부터의 강요된 근대화'의 전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신 음력설은 민족 문화를 그대로 지킨다는 명목하에 계속 기념되었다. 음력설은 결국엔 한국의 근대화주의자들이 사회의 강력한 관성에 항복을 선언하면서 다시 공식적인 명절 지위를 획득했다. 1985년 구정은 '민속의 날'로 부활했고, 노태우 정부인 1989년에는 '설날'이라는 이름도 회복했다. 구정과 신정에는 한국 근대화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라는 주제가 함축돼 있는 셈이다.

ⓒ일러스트 오상민

뉴진스의 다니엘 문자메시지가 도화선 돼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설날은 다시금 분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설날만의 문제를 넘어 추석을 포함하는 명절 전반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었다. 1990년대가 되었을 때 한국은 도시 중심의 소비사회가 되었고, 양질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경제 영역에 대거 참여하는 사회적 대전환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세대들 위주로 명절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남성들은 짜증 나는 교통체증을 견디며 기나긴 귀성 운전을 해야 하고, 여성들은 차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동원되고, 불편한 친척들 잔소리를 굳이 견뎌야 하냐는 것이다. 이런 반발의 세기는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다. 대도시 태생 인구 비중의 상승, 해외여행의 급성장으로 상징되는 연휴 문화의 변화 등 한국이 선진화되면서 명절을 기려야만 하는 이유보다 기리지 않아도 될 이유가 훨씬 더 많이 늘어난 것이다. 설날은 일본제국과 군부 정권의 억압 속에서도 살아남고 부활했지만, 역설적으로 부활하자마자 과거와 같은 사회적 위상은 절대 되찾을 수 없음이 드러난 셈이다. 그들이 강력하게 추진한 근대화에 의해서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2020년대가 시작되었을 때는 명절, 특히 설날의 위상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시간적으로 양력설과 크게 차이 나지 않기에, 새해를 두 번 맞이하게 되면서 혼란스럽기만 하고, 양력설과 음력설 사이의 기간이 너무 애매해진다는 불평도 자주 제기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설날은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대체가 불가능한 명절인 추석과는 분명 달랐다. 마침 인구 이동에 대대적인 제약을 건 코로나 팬데믹이 다가오자, 굳이 바이러스 전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명절에 함께 모이기보다는 설날을 생략해도 된다는 분위기가 굳어졌다. 그러나 팬데믹이 끝나더라도 이제 설날은 과거와 같은 위상으로 부활하지는 않을 듯하다. 해외여행에 대한 제약도 함께 풀리면서, 많은 이가 설연휴를 해외여행에 대한 갈증을 푸는 시간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2023년 설날이 '선택적 명절'이 되었음이 명확히 드러났음에도, 설날은 다시금 새로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월19일 걸그룹 뉴진스의 멤버 다니엘은 영어로 소통하며 "중국 새해(Chinese New Year)에 뭐 해요?"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메시지는 곧이어 엄청난 화제가 되었는데, 인터넷 공간에서 한국과 중국의 네티즌이 벌여온 '설날 전쟁'을 정면으로 직격하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설날 전쟁은 아시아인들이 영어권 세계를 통해 국제화되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불거진 문제다. 

中, 'Korean Lunar New Year' 공격

영어권에서는 주로 동아시아인을 중국인을 통해 접해 왔기에, 음력설을 '중국 새해(Chinese New Year)'라는 말로 일컬어왔다. 하지만 한국인이나 베트남인들은 설날이 중국에서 기원하기는 했지만, 이미 각 나라에서 고유의 명절로 토착화되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공동의 명절로서 '중국설'은 적합하지 않다며 반발했다. 그들이 주로 제시하는 대안은 '음력 새해(Lunar New Year)'다. 여기에 대해 중국 네티즌들은 다시 한번 강력하게 반발했다. 명백히 중국의 역법에서 기원한 명절을 구태여 중국설이라고 칭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기 K팝 아이돌이 '중국설'이라는 말을 쓴 것은, 한국 네티즌 입장에서는 '경솔한 반역 행위'로 여겨졌다. 

결국 다니엘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중국설과 음력설로 논란이 된 사례는 이것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 방탄소년단은 한복을 입고 'Happy Seollal'이라고 하면서 한국어 설날을 전면에 내걸었고, 논쟁을 비껴갈 수 있었다. 반면 대영박물관은 트위터 계정에 'Korean Lunar New Year(한국 음력설)'라는 말을 썼다가 중국 네티즌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게시글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설날 전쟁의 주요 참가자들이 막상 설날을 선택적인 명절로 기리고, 전통적인 차례나 성묘, 귀성과는 점점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신세대라는 것은 무척이나 역설적이다. 하지만 설날을 둘러싼 싸움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는 동시에 필연적인 일이기도 했다. 당초 설날은 위로부터의 근대화에 대한 아래의 저항을 상징했다. 근대화를 거친 이후에는 불편하게 사람을 옥죄는 전근대적 유습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 동아시아 문명이 부상하고, 인터넷을 통해 그들이 활발히 교류하게 되면서, 설날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는 누군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상징이자 지표가 되었다. 특히나 고도의 정보화로 인해 정체성 정치와 문화 전쟁이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지금, 설날의 역사를 다시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을 넘어 고도로 정치적인 활동이 된 셈이다.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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