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서늘한 얼굴들은 서로를 욕망하지 않았다

한겨레 입력 2023. 2. 4. 13:25 수정 2023. 2. 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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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유랑의 달>
영화특별시SM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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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유랑의 달>의 결말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얼굴의 영화. <유랑의 달>을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인형처럼 웃다가도 갑자기 서늘해지는 히로세 스즈(사라사 역)의 얼굴과 곧 바스라질 것 같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 혼돈을 숨긴 채 시선을 피하는 마쓰자카 도리(후미 역)의 얼굴, 그리고 삶의 무게 속에서도 샘처럼 솟아나는 에너지와 장난기를 숨길 수 없는 시라토리 다마키(사라사 아역)의 얼굴을 빼고는 이 작품을 말할 수 없다.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 얼굴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한 영화’다. 관람 후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 감정을 정리하는 데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소아성애, 가해자, 피해자, 재회,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인질범에 동조하는 심리적 현상). 영화에 대해 표면적으로 던져져 있는 키워드들 중 어떤 것도 <유랑의 달>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작품이 이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이 영화를 증오한다면, 그건 이 이상함 때문이다.

사라사와 후미의 비밀

사라사에게는 모두가 수군거리는 과거가 있다. 그건 15년 전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납치 사건. 당시 열아홉살이었던 소아성애자 사에키 후미는 열살 사라사를 납치해 감금했다. 결국 사라사는 구출되고, 떠들썩했던 세간의 관심은 이내 다른 사건으로 넘어갔다. 그래도 피해자인 사라사의 신상만은 “변태에게 온갖 일을 당한 불쌍한 여자”라는 꼬리표와 함께 온라인 세계를 영원토록 떠다니고 있다.

그러나 사라사에게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비밀이 있다. 그가 “불쌍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 애초에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후미를 따라나선 건 그 자신이었고, 후미는 그에게 어떤 강압적인 요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밤마다 사촌오빠의 성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사라사는 후미의 집으로 도망친 뒤에야 비로소 잠을 잘 수 있게 된다.

후미를 잊지 못하던 사라사는 우연히 그와 재회하게 되고, 그의 곁을 맴돈다. 엽기적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라는 사실이 삼류 주간지를 통해 가십으로 소비되면서 “변태 후미”는 다시 궁지에 몰린다. 그리고 또 다른 비밀이 드러난다. 이번엔 후미의 비밀이다. 그는 사실 어린 여자아이를 욕망하지 않는다. 후미를 수치심의 방으로 몰아넣은 건 용인되지 않는 성적 욕망이 아니라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은 신체의 비밀이다.

영화는 ‘정상성’의 규범에 따라 사람에게 쉬이 낙인찍는 세계를 날카롭게 돌아본다. 성폭력으로 마음을 다친 사라사와 비규범적 신체에 갇혀 마음을 닫아버린 후미는 서로의 조각난 영혼을 알아봤을 뿐이다. 하지만 세계는 그들을 ‘변태성욕자’와 ‘정신이 망가진 피해자’로 볼 뿐이다. 영화는 질문한다. “정상성이란 무엇인가? 그에 따른 단죄가 온당한가? 당신은 과연 그 ‘비정상성’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여기까지가 영화가 꺼내놓는 질문이다. 윤리적으로 고귀하고, 미학적으로 유려하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영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사라사와 후미의 ‘성욕 없음’을 분명히 묘사하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3인칭 시점의 카메라로 두 사람을 관찰한다. 두 사람 모두 지극히 말이 없으므로, 그 내면을 설명하는 건 결국 그들의 얼굴과 신체 이미지다. 그러므로 관객은 대체로 그 이미지와 맥락상 주어진 정보들을 통해 작품 속 상황을 해석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감독의 짓궂은 게임이 시작된다.

영화의 시작, 카메라는 어린 사라사의 목덜미를 클로즈업한다. 틀어 올린 사과 머리에서 빠져나온 여러 가닥의 머리카락과 잔머리가 하얀 피부를 따라 흘러내린다. 그 목덜미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장소는 놀이터. 우산을 든 후미가 그 목덜미 앞에 나타난다. ‘납치’의 순간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이미지의 연결은 관객에게 해석의 가이드를 제시하고, 이를 통해 관객은 어린 소녀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자리에 얽매이게 된다. 이 긴장은 어린 사라사가 등장할 때마다 다양한 강도로 반복된다.

이 순간부터 관객은 복잡한 질문의 회로 속에 갇히고 만다. 어린 소녀의 신체 주위로 형성되는 이 성적 긴장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나는 지금 후미의 시선에 동일시하고 있나? 혹은 후미를 핑계로 삼는 카메라의 시선에 연동되어 있는 건가. 어린 소녀의 섹슈얼리티는 재현할 수 없는가. 스크린 속 대상의 마법적 힘은 에로티시즘과 분리될 수 있나. 이 모든 건 나만의 불온한 질문인가.

혼란을 짊어진 채로 영화가 끝나갈 무렵, 감독은 아주 갑작스럽게 전혀 성장하지 않은 후미의 ‘어린 성기’를 관객 앞에 내던진다. 고통의 근원은 이 작은 뿌리였다. 관객은 허를 찔리고 만다. “후미는 어린 사라사를 욕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쾌락은 누구의 것인가?” 하지만 이건 부당한 손가락질이다. 영화에 스며들어 있던 성적 긴장이 비록 후미의 것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영화가 기꺼이 가지고 놀기로 마음먹고 구성해낸 긴장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아주 잘 짜인 덫에 빠진 셈이다.

관객을 함정에 빠트린 감독

그래서 <유랑의 달>은 이상했다. 이 ‘가련한 남자’는 소아성애자가 아니었고, 그렇게 영화는 후미와 함께 어린 소녀를 성적으로 대상화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난다. 그러면서도 ‘케첩 장면’에서 원작에 존재하는 후미의 결정적인 말, “어린 소녀에게 성적 욕망은 자라지 않았다”는 내레이션을 누락해버림으로써 결말을 모호하게 열어놓는다.

영화는 사라사가 사촌오빠와 연인 류에게 당하는 잔혹한 폭력들을 통해 150분 내내 강조했다. 문제는 누구를 욕망하는가가 아니라 침해와 폭력, 존엄의 강탈이라고. 이 문제를 건드리고 싶었다면, 좀 더 용감했어야 하지 않을까. 관객들만 함정에 빠트리는 건 영리하지만, 꽤 고약한 짓이다. 그뿐만 아니라 감독의 이런 선택으로 원작이 묘사하고 있는 사라사와 후미의 무성애적 동반자 관계는 영화 속에서 지워지고 만다는 점 역시 곱씹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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